의문사

우리는 네 얼굴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네 피투성이 시체도 보지 못했다.
너는 죽어서도 어디로 끌려가서 불타 버렸다.

황사바람 속에서 모든 산은 보이지 않고
몇 자루의 뼈로 네 어머니 앞에 네 목쉰 형제 앞에 돌아왔다.
우리들의 검정가슴 앞에 그렇게 돌아왔다.

김두황 / 김상원 / 김성수 / 김용권 / 노철승 / 박상구 / 박종근 / 신호수 / 이내창 / 이덕인 /

이이동 / 이철규 / 정경식 / 최우혁 / 한희철 / 허원근 /

 

 

no1
김 두 황 (당시 23세)
1960년 6월 23일 서울 출생
1980년 고려대학교 정경계열에 입학
1982년 3월 학회활동을 주도
1983년 경제학회 학회장
1983년 3월 학생운동 관련 성북서에 연행되어 강제징집됨
1983년 6월 18일 보안사의 ‘녹화사업’ 도중 6월 18일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3남 3녀중 3남으로 태어나 ’80년 고대 정경계열에 입학하였다. 3학년 말, 학내활동을 반성, 평가하고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뜻을 같이 하던 친구들과 모임을 갖고, 축제 및 학도호국단 선거, 4.19행사 등에 관해 토론하고 방향과 대안을 계획하던 중 ’83년 3월 8일 성북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8일 강제징집 되어 보충대에 입대하였다. 그 후 ’83년 6월 18일 보안사의 녹화사업으로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군당국은 내성적 성격으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소외감 내지는 열등감으로 인한 복무염증으로 자살한 것으로 동기를 발표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사건 당일, 오후 6~8시경 단발음의 총성이 소속대 인근에서 먼저 발생하였고, 보고지연 지시와 초동 현장출동이 이루어진 후 헌병대 수사기록상의 현장에서 연발음의 총성이 발생한 이유와 보안사령부로 보고된 「사망사건보고서」를 기무사를 통해 공개를 요구하였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 화장, 고대 민주광장 추모비
no1
김 상 원(당시 33세)
1953년 5월 7일 출생
1986년 3월 10일 영등포에서 불신검문에 항의하다가 연행됨
1986년 5월 26일 식물인간으로 투병생활 중 운명
1990년 12월 민사소송에서 경찰의 유죄가 인정됨
동지는 ’86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당시 영등포 산업선교회에 집결해 있던 노동자들이 영등포로터리까지 진출해 벌이던 대규모 노동자 가두데모 직후 경찰관들이 비상 순찰 중이던 상황에서, 집으로 가던 중 불심검문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중앙파출소로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중앙파출소에서 그곳 소속 경찰관들로부터 전신을 폭행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식물인간이 된 채 영등포경찰서에 의해 영등포 시립병원에 행려환자로 위장, 입원되었다. 영등포경찰서 및 중앙파출소 경찰관들의 철저하고도 조직적인 은폐아래 중환자실에서 77일간을 신음하다 5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였다.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no1
김 성 수(당시 18세)
1968년 4월 15일 출생
1986년 2월 강릉고 졸업
서울대 사회과학대 입학
연극부에 가입하여 활동
1986년 6월 18일 행방불명
1986년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멘트덩이를 매단 채 의문의 죽음. 해녀에 의해 발견
동지는 ’86년 3월 서울대에 입학한 이후 지리학과 ‘철학인의 모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연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사회과학 세미나를 하고 정부비판적인 연극에 참여하였다. 또한 각종 집회·시위 등에 참여하는 등 시위 중 두 차례 연행되었다가 훈방된 일이 있었다. ’86년 6월 18일 자취방으로 걸려온 정체불명의 사람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고, 그 후 3일이 지난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 방파제 앞 바다 속에서 바위틈에 세 개의 시멘트 덩어리를 달고 눕혀져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 해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당시 매달려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는 직접 물에 가지고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워 사망 또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타의에 의해 수장되었을 개연성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no1
김 용 권 (당시 23세)
1964년 6월 10일 출생
1983년 서울대 경영과 입학
1985년 카튜사 자원 입대
1987년 2월 20일 내무반에서 의문의 죽음
서울대에 입학한 동지는 ’85년 10월 카투사 병으로 지원 입대하여 복무하던 중 ’87년 2월 20일 막사에서 침대에 목을 매단 채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되었다. 동지의 어머니는 그날 오전 10시경 부대로부터 급히 부대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서 아들이 막사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검사는 이미 끝난 상태였으며 병원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유가족들이 동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월 28일이었다. 자살할 만한 별다른 징후를 보이지 않았고 장남으로서 동지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소식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동지가 고문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발견된 날에도 몇 가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전개된 것으로 보아 타살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동지의 유가족들은 ‘고문 및 의문의 사망에 관한 진상조사와 관련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작성하고 이를 고문폭력대책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위원회는 진정서를 접수 의문사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동지의 집을 방문하고 자체적으로 조사하였다. 또한, 민간차원 대응을 모색하여 민간단체 스스로 조사를 하고 조사보고서와 성명서를 발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미8군 사령관에게도 진정서를 넣어 엄정한 조사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천 민주공원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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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철 승 (당시 22세)
1965년 3월 5일 출생
1983년 광주상고 졸업
1985년 6월 26일 군 입대
1987년 3월 1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수도방위사에서 근무하던 중 ’86년 4월 상급자들로부터 기합, 구타 등으로 다쳐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87년 2월 15일 원대 복귀하여 ’87년 3월 1일 8시 50분에 특정 지역(청와대 뒷산) 삼일초소 남방 450m 지점에서 총탄 2발을 머리에 맞고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동지의 형이 조선대 재학 중 ’85년 5월 군에 입대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군법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어서 동지는 신원이 부적합한데 특수부대내에서 근무하면서 형과 내통(편지를 수사기관에서 보관중임) 한다고 보안부대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문점은 ’87년 원대 복귀 시 집에서 돈을 소지하고 바로 특정지역에 배치되었는데 유품에 돈이 전혀 없었던 것, 부검 시 하체에 모세혈관 파열상이 심했고, 유서가 없었으며, 제대가 9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군 당국의 조사내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 당시 행적을 알기 위해 내무반 동료들의 명단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총탄 두 발을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K-2 자동소총으로 두 발은 나갈 수 없다고 하는데 두발만 나간 점, 총탄 삽입구가 이마이고 총알이 나간 곳은 뒷목 부위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불가능한 자세가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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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상 구(당시 20세)
1967년 7월 6일 경남 울산 출생
1983년 중앙중학교 졸업
1985년 2월 대구공고 졸업
1985년 12월 하사관 입대
1987년 5월 11일 군대 내에서 의문의 죽음
동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5년 12월 하사관으로 입대하여 탄약창과 시설계 양묘 관리 사관으로 군복무를 하였다. 동지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병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여 군생활 전반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 ’87년 5월 9일 외박 후 복귀과정에서 ‘서머타임’ 실시로 규정시간에 복귀하지 못하여 일직사관으로부터 심한 구타와 질책을 받았다. 이후 5월 10일 오후 8시에서 10시 사이 무기고 초소병이 쓰러져 있는 동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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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종 근(당시 25세)
1963년 경북 상주 출생
1982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한의학과 입학
1988년2월 졸업후 경주 불교한방병원 인턴 근무
1988년 6월 방위병으로 입대
1988년 8월 1일 동사무소 창고에서 의문의 죽음 당한 채 발견
동지는 동국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경주 불교한방병원에서 인턴활동을 하던 중 ’88년 방위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러나 중대장과 헌병대 파견대장은 사고발생 1주일 전부터 동지에게 녹용이 든 보약을 지어오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비싼 보약을 지어 오라는 중대장의 무리한 요구에 고심하던 동지는 가정형편상 어렵다는 내용을 중대장에게 편지로서 전달하였다. 이에 중대장은 ’87년도 예비군 훈련 계획표를 동지가 잃어버렸다고 뒤집어 씌워 궁지에 몰아넣고 남한산성에 갈지도 모르고 한의사 면허를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며 협박과 함께 보약 상납을 요구하였다. 이에 7월 30일 동지는 어머니와 함께 면담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중대장은 낚시 간다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그 다음날인 8월 1일 출근한 후 화재가 났고 문쪽으로 향한 채 누워있는 동지를 끌어냈다. 유가족은 부검을 통해, 기도에서 쌀알만 한 분진이 발견되었고. 뒷머리에 멍이 있는 점 등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였다. 군당국은 행정체계를 앞세워 부모의 동의 없이 화장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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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호 수(당시 23세)
1963년 8월 8일 전남 여수 출생
1980년 2월 성동중 졸업
1983년 5월 검정고시 합격
1984년 4월 23일 방위 입대
1985년 11월 30일 인천 중구 항동 소재의 연안가스 입사
1986년 6월 11일 연안가스에서 근무 중 서울 서부서형사들에 연행 후 행방불명
1986년 6월 19일 전남 여천군 대미산 동굴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
동지는 ’86년 6월 11일 오후 2시경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부경찰서로 연행된 후 실종되어, 같은 달 19일 전남 여천군 돌산읍 대미산 중턱의 바위굴 속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당시 동지는 향군법 위반으로 지명수배 중이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병을 조사계로 인계해야 했으나 수사를 담당한 경찰은 이러한 상식에 반하여 3시간 만에 훈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북대학교 법의학교실의 감정회보는 동지가 발견된 날로부터 하루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치안본부 수사지도관실에서조차 대공관련 수사에 전혀 개입하지 못했고, 대공팀으로부터 별도로 통보받았다는 점에서 조직적으로 조작, 은폐하였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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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 창(당시 27세)
1962년 서울 출생
청구초등학교, 대경중학교, 중동고등학교 졸업
1983년 군 입대
1985년 군 제대
1986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학과 입학
1987년 만화판화패‘새김’창립, 회장 역임
1988년 조소학과 과학생회장 역임, 학과내에 ‘민족미술연구회’창설,
‘서울지역 미술대학 연합 건설준비위원회’ 주최, 청년미술대학 한마당 개최
1989년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1989년 8월 15일 거문도 소재 덕촌리 유림해수욕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86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예술대학 조소학과에 입학하여 ’88년 과학생회장을 역임하였고, ’89년에는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대의원 및 수원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수대협’) 중앙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통일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89년에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학생을 방북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직접 방북 자금 마련과 공안기관의 사법처리에 책임을 지기로 하는 등 공안기관의 예상되는 탄압을 무릅쓰고 실질적인 준비를 2개월에 걸쳐 진행하였다. 동지는 이러한 활동 중 8월 14일 신원미상의 남녀 2명이 방문한 뒤 행방불명되었고, 8월 15일 오후 7시경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당시 평양축전 참가 방북대표 파견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첩보로 입수, 보고되었고 대공수사국에서 민족해방운동사 전시회 등과 함께 내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부분적으로 확인되었으나 아직 정확한 진상규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천 민주공원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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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덕 인(당시 27세)
1967년 12월 전남 신안군 출생
1995년 6월 아암도에서 노점 시작
1995년 11월 25일 노점 철거에 반대 망루 농성 중 지부연대 위해 이동
1995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철거 감시용 망루에서 농성중에 있던 이석근씨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로 인천 앞 바다에서 발견
동지는 ’95년 7월 인천시가 아암도에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하자 이 지역에서 전국노점상연합회 동지들과 함께 장애인의 자립기반 마련을 목적으로 노점을 시작하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아암도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는 이유를 들어 용역회사를 고용, 경찰의 비호아래 1,500여명을 투입 생존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수 십 명의 노점상들을 11월 24일 오전 7시 한겨울 추위에 내모는 철거를 집행하였다. 노점상들은 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고 보고 10월경에 건설해 둔 망루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전개하였다.11월 25일 저녁 동지는 고립 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외부에 소식을 알리고자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탈출을 결심한다. 동지는 동료와 함께 저녁 8시 45분경 탈출을 시도 먼저 망루를 내려오다, 동료는 경찰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망루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듯하여 동지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 후 다시 망루위로 올라갔다. 이것이 동지의 마지막 생전모습이었다. 망루를 떠난 지 3일 뒤 11월 28일 오전 10시경 동지는 농성장 근처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극도의 허기 그리고 추위와 싸우면서 근근이 버티던 동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의 죽음은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no1
이 이 동(당시 21세)
1966년 4월 전남 광주 출생
1985년 2월 숭일고 졸업
1985년 3월 전남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
1987년 1월 휴학, 입대, 육군 군수사령부 제9탄약창 경비중대 배치
1987년 6월 15일 총격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군입대 전 전남대학교 교육학과 재학시절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등 교육학과 학회활동을 하였으며, 민주화 및 민중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교내 집회 및 시위에 참여하였다. ’87년 1월 10일 군에 입대하여 근무하던 중, 같은 해 6월 15일 중대막사 서북면 산 능선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지휘관들은 고참병에게 구타를 당하는 것을 인지하고도 가벼운 주의만 주고, 구타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지 않는 등 사병관리에 소홀하였고, 당시 헌병대와 중대장 등은 동지의 사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실탄을 조작하였다. 사망 전날 근무편성 작업과 관련하여 심한 구타를 당하였고, 사망사고의 현장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최초 발견상태가 훼손되었으며, 총기의 위치 등을 재현하는 과정에서도 또 변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정확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no1
이 철 규(당시 24세)
1965년 5월 6일 전남 장서군 삼서면 대도리 관동부락에서 태어남
1982년 2월 금호고등학교 졸업
1982년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 입학
1984년 조선대학교 민주화 자율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1985년 반외세 반독재투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1985년 11월 14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2년형을 선고받음
1987년 7월 8일 6·29 조치 이후 가석방. 2학기에 3학년으로 재입학
1988년 2학기「민주조선」 편집위원장
1989년 4월 「민주조선」발간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배를 받음
1989년 5월 3일 행방불명
1989년 5월 10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됨
동지는 ’82년 대학에 입학한 뒤 민주화 투쟁을 하였고, ’85년에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2년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88년 하반기부터 조선대 교지 편집위원장으로서 「민주조선 창간호」를 발간하는 등 통일운동과 사상, 표현의 자유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북한 바로알기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교지에 ‘미제침략 10년사’를 쓰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동지는 ’88년 초부터 ’89년 사망 전까지 학원 및 사회민주화를 지향하는 호남대 활동가들의 학습모임을 지도하였다. 동지는 ’89년 5월 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받던 중 광주 제4수원지 삼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피해 도망친 후 5월 10일 수원지에서 익사된 채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동지를 검문한 북부경찰서 수사과 경찰관들 외에 제3의 공안기관에서 검문 도중 도망친 사실을 알고 동지를 찾기위해 수색활동을 벌인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당일 제3의 공안기관에서 동지를 미행 또는 감시한 것으로 추정된다.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no1
정 경 식(당시 28세)
1959년 12월 15일 출생
19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 입사
1987년 2월 회사의 임금동결에 항의하는 중식거부투쟁에 참여
1987년 5월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대의원선거 및 노조지부장 선거에 참여
1987년 5월 28일 회사 측의 대의원 매수공작으로 민주노조건설 방해
1987년 6월 8일 외출 후 실종
19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
동지는 ’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하여 ’87년 2월경 회사의 임금동결에 항의하는 중식거부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5월경 노조 대의원, 지부장선거에서 민주파 대의원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민주파 활동가 모임에 참석하는 등 민주노조 건설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87년 5월 노조지부장 선거와 관련하여 지지후보가 달랐던 반대파 조합원 이 모씨와의 상해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고소로 경찰서 출두요구서를 받기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6월 8일 행방불명되었다. ’88년 3월 2일 창원공장 인근 불모산 기슭에서 유골로 발견되었다. 당시 창원경찰서와 마산지검은 동지가 이모씨와의 폭력사건 합의가 어려워지자 구속을 두려워한 나머지 실종 당일인 ’87년 6월 8일 변사현장에서 목을 매어 비관, 자살한 것으로 수사종결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동지의 사건은 실종에서부터 변사사건 내사종결까지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에 의해 조작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에 안장
no1
최 우 혁(당시 21세)
1966년 3월 4일 서울 출생
1984년 3월 서울대 서양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중 수차례의 구류를 삶
1986년 5월 20일 학내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전치 10주의 부상
1987년 4월 23일 군입대
1987년 9월 8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84년 서울대에 입학 학생운동 동아리인〈경제법학연구회〉에 가입하여 각종 시위와 집회에 참석하였다. 동지는 ’86년 하반기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현장 활동을 준비하였고, 과외를 하여 수배자를 돕기도 하였다. 군입대 직전까지 민주화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노동현장으로 이전을 준비하였다.
동지는 경찰에 구류와 부상을 당한 후 가족들의 권유에 의해 ’87년 4월 군에 입대하게 된다. 9월 8일 부대내에서 분신한 상태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는 훈련소에서부터 보안사령부 및 보안부대, 지휘관 및 부대 군종부에 의해 보직이 변경되는 등 일상생활 깊숙한 부분까지 체계적으로 관찰·관리되었다. 운동권 출신 관찰사병이라는 사실이 부대원들에게 알려져 얼차려, 언어폭력 등 차별 대우를 받았고, 유격훈련 중에는 조교의 구타로 팔에 부상을 입기까지 하였다. 기무사의 자료 비협조로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가 완전히 밝혀지지 못하였다. 윤석양 양심선언에서 밝혀진 ‘서울대생 동향파악 대상자’ 378명의 카드에서도 최우혁의 카드가 존재하는 점 등 보안사의 지속적인 관찰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no1
한 희 철(당시 22세)
1961년 2월 11일 경남 마산 출생
1979년 2월 철도고 졸업
3월 서울공대 기계설계학과 입학(철도청 장학생)
서울대 가톨릭학생회 활동
1982년 12월 1일 군에 입대
1983년 12월 11일 녹화사업을 받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79년 서울대학교에 입학 후 동아리인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시작해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민주화와 민중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주민등록증 일제 갱신 시기여서 수배중인 운동권 학생들이 도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도와주려다 이 사실이 보안사에 발각되어 휴가복귀 후 부대근무 중 ’83년 12월 6일 보안사령부로 연행 이 사건으로 군부대 녹화사업을 받게 되었다. 입대 전 학생시절의 민주화운동과 야학연합회 사건 관련 혐의로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5일 동안 취조를 받고난 후 12월 10일에 석방돼 부대에 복귀했고 그 다음날인 12월 11일 새벽 4시 30분경 동지는 부대 내 문서 보관창구 앞 보초서는 자리에서 가슴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보안사의 불법적인 연행, 조사 및 폭행 가혹행위와 죽음이 인과관계가 있어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한 사망으로 인정했다.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no1
허 원 근(당시 22세)
1962년 5월 15일 전남 진도 출생
1981년 2월 광주 대동고 졸업
1981년 3월 부산 수산대 입학
1983년 군 입대
1984년 4월 2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2002년 9월 1기 의문사위 타살이라고 인정
2007년 4월 국가대상 손배소 제기
2010년 2월 1심 재판부 국가배상판결
2015년 9월 대법원 국가배상확정판결
2017년 5월 16일 국방부 순직인정
동지는 1984년 4월 2일 부산수산대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강제징집으로 강화도 화천군 육군 제7보병사단에 근무하던 중, GOP 철책근무지 폐유류고 뒤에서 가슴에 두발과 머리에 한발의 총상을 입은 채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됐다. 그러자 육군 헌병대는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01년 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는 부대 내 진급축하 자리에서 상사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2기 위원회에서는 미국경찰 현장감식반·총기전문가 등의 ‘사체가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과 당시 부검의의 ‘자살로 보기는 어렵다’는 소견을 확보하였으며, 국방부 특별조사단이 허일병 사건(새로운 증거의 은폐, 진술조서의 조작, 무리한 대질조사 등)을 재은폐하려고 노력했던 정황을 확인하여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2015년 9월 10일 대법원은 허일병의 타살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군의 부실수사를 인정하고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지불하라고 판결하였다. 사건은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은 것이다. 다만 2017년 5월 16일 국방부는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허일병의 사망을 자살인 아닌 순직으로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