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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대공분실의 시간’을 허하라

작성자
이은정
작성일
2019-07-16 23:06
조회
26
‘남영동대공분실의 시간’을 허하라

남영동대공분실에서 고문이 사라진 것은 꽤 오래 전일 것이다. 하지만 인권이 무참하게 말살되었던 남영동대공분실은 '경찰청인권센터'라는 간판을 달고 여전히 가해자인 경찰에 의해 운영되면서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남영동대공분실에서 이루어졌던 인권탄압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고문의 현장 남영동대공분실이 시민의 품으로 들어왔다. 남영동대공분실을 되찾은 우리 시민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고문을 위해 지어져 수십년 동안 고문이 이루어졌던 현장인 남영동대공분실 건물 자체가 군사독재 정권 하의 인권탄압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산 증거이긴 하지만, 건물은 껍데기일 뿐이다. 남영동대공분실의 진짜 컨텐츠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남영동대공분실을 되찾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남영동대공분실에서 자행된 고문의 역사를 밝히는 일이다. 이 곳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의 진상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밝혀내고, 그런 다음엔 더 나아가 지방의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일도 밝혀내야 한다.

또한 군사독재 하에서 고문이 이루어진 곳은 남영동대공분실만이 아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에서는 더 심한 고문들이 수없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고 원형이 보존된 곳도 찾기 힘들며 국가폭력을 증언하는 기념관으로 조성될 가망성도 현재로선 거의 없다. 그렇다면 국가폭력의 현장 중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되어 기념관으로 조성될 남영동대공분실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지 않은가?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다른 기관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진상까지도 규명하는 중심지 역할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 100년 역사에서 한번이라도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된 적이 있는가? 과거사 청산이 안된 대한민국의 현재의 모습은 참혹하다. 연일 망언이 터져나오고, 피해자들의 상처난 가슴은 다시 피멍이 든다. 죄지은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지금 이 곳에서도 죄를 짓고도 뻔뻔한 얼굴로 떵떵거리며 잘사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
역사를 청산하려고 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가해자나 기득권 세력 내에서 반발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군사독재 하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역사를 청산하겠다는 목표를 확고하게 세우고 꿋꿋하게 나아간다면 제대로 할 수 있는 시대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이제 없다.

독일은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독일을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아우슈비츠라고 한다.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최악의 재앙인 아우슈비츠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독일 국민들은 수준 높은 정치의식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거리를 걷다 보면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록한 수많은 표지석과 마주친다고 한다. 시민들은 매일 아우슈비츠를 만나는 것이다. 너무 지나친, 과잉 청산이 아닌가라고 물을 정도로 일상에까지 과거가 들어와 매일매일 과거의 끔찍한 순간을 되새기게 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일상에서 매일 과거와 만나는 것이 좋다. 피해자와 만나는 것이 아름답다”라는 데 대부분이 동의한다.

지금 남영동대공분실이 기념관으로 조성되려고 한다. 하지만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인가?
기념하기에 앞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 내야 하지 않는가?
국가폭력의 참혹한 진상을 먼저 명명백백하게 밝혀내 뒤에,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여러 전문가들이 충분히 논의하고, 이러한 컨텐츠들을 위한 공간이 추가로 필요하다면 그때 증축을 논의하는 것이 남영동대공분실을 기념관으로 만드는 제대로 된 순서다.

증축을 논의할 때도 역사적 장소의 원형을 훼손하는 것이 꼭 필요한지 몇번이라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서대문형무소나 전남도청처럼 원형을 훼손했다가 다시 원형대로 복구하는 시행착오를 남영동대공분실에서는 절대 되풀이해선 안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남영동대공분실을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남영동대공분실의 차가운 조사실에서 고통받은 고문 피해자들의 피울음이 들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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