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열사

f-300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강민호 / 강현중 / 고정자 / 권미경 / 김경숙 / 김낙성 / 김봉환 / 김상옥 / 김성애 / 김성윤 /

김수배 / 김시자 / 김왕찬 / 김윤기 / 김장수 / 김종수 / 김종태 / 김종하 / 김주리 / 김진수/

김처칠 / 김현욱 /

ㄹ-ㅅ
류타원 / 문송면 / 문용섭 / 박문곤 / 박미경 / 박복실 / 박삼훈 / 박성호 / 박영진 / 박용선 /

박응수 / 박종만 / 박진석 / 박창수 / 배주영 / 배중손 / 변형진 / 서영호 / 서전근 / 석광수 /

성완희 / 송철순 / 신용길 / 신호수 /


양봉수 / 오범근 / 오용철 / 오원석 / 원태조 / 유구영 / 유인식 /유재관 / 윤용하 / 이광웅 /

이대건 / 이대용 / 이문철 / 이상남 / 이상모 / 이석구 / 이석규 / 이순덕 / 이영일 / 이재호 /

이종대 / 이진희 / 임종호 / 임혜란 / 임희진 /

ㅈ-ㅎ
장용훈 / 전태일 / 정경식 / 정영부 / 정영상 / 정운갑 / 조경천 / 조수원 / 조정식 / 채희돈 /

최대림 / 최 동 / 최명아 / 최성근 / 최성묵 / 최성조 / 최완용 / 최 웅 / 최윤범 / 최태욱 /

표정두 / 홍기일 / 홍장길 / 황보영국 /

no1
강 민 호 (당시 24세)
1966년 2월 16일 전북 출생
1981년 2월 도봉중학교 졸업
1984년 동성고등학교 졸업
1985년 3월 한신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1986년 10월 건국대 애학투련사건으로 구속, 집행유예로 석방
1987년 12월 구로구청 부정개표 사건으로 2년 선고
1988년 10월 특별사면으로 석방, 복학
1990년 3월 28일 대붕전선 입사
1990년 4월 4일 야간작업 중 기계에 휘말려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한신대학 시절 강민호 동지는 모범적인 생활 태도를 견지하여 많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아왔다. 동지는 이 땅의 구체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되면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적으로 앞장서 왔으며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하다 2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동지는 노동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대학졸업장을 거부하고 노동자의 삶을 자기의 삶으로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동지가 다니던 공장은 약15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붕전선이라는 회사로서 12시간 주야 맞교대 근무제로서 장시간 노동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동지는 입사한지 7일째 되던 날 야간 작업을 하다가 연신기 주위에 있는 폐선을 치우기 위하여 1.5미터 되는 연신기 기계 사이의 통로를 지나다가 메고 있던 폐선이 회전하는 연신기에 휘말리면서 몸도 따라 들어가 비명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no2
강 현 중 (당시 26세)
1963년 4월 27일 충북 음성 출생
1981년 10월 5일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 중퇴
1987년 12월 5일 경동산업 입사
1988년 5월 4일 <디딤돌>이라는 친목회를 구성하여 회장으로 활동
1989년 8월 31일 ∼ 9월 4일 회사의 부당징계조치에 항의농성
1989년 9월 4일 노무이사와의 담판이 결렬되자,
노무이사에게 신나를 끼얹고 함께 분신, 조합원들에게
“경동의 동료들은 싸워 이깁니다” “노동자는 승리합니다”라고 절규
1989년 9월 9일 한강 성심병원에서 운명 부여 선산에 안장
89년 9월 4일 인천 주안5공단에 소재한 경동산업에서 노동자 5명이 집단 분신 할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산재, 노동조합집행부의 어용성, 대량해고 등 노동자들의 탄압에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경동산업은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위해 조합원들로 구성된 친목단체 ‘디딤돌’ 회원들이 8월 투쟁 2주년을 기념하고 9월 대의원 선거에 앞서 단결을 모도하기 위하여 일일 찻집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노동자들을 징계에 회부하였다. 21명이 복지관 4층 옥상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으나 회사측은 구사대를 동원하여 농성 노동자들을 고립시켰으며, 지원나온 가족들과 해고 노동자들을 실신할 정도로 집단 폭행하는 등 사태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런 상황속에서 최종 협상을 위해 노무이사와 담판을 하러 갔으나 ‘징계를 받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격분시켰고, 급기야 동지들은 분신, 할복하게 된 것이다.
no3
고 정 자
1978년 원진레이온 입사 후 처리 정련과에서 15년간 근무
1991년 직업병 증세 발견
1993년 5월 21일 직업병에 의한 정신분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음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고정자 동지는 78년 입사하여 일하던 중 팔다리가 마비되고 우울증, 성격변화 등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매년 특수건강검진 결과 정상 판정이었다가, 91년 원진레이온 전·현직 노동자 1500명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 한가지만 직업병으로 발견되었다.
의학적으로는 직업병이었고 법률적으로는 정상으로 판정되어 1년간 방치되는 과정에서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직업병 증세인 정신분열로 자살하게 되었다. 운명 2일 후 노동부는 이를 직업병으로 인정치 않음으로서 수많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no4
권 미 경 (당시 22세)
1969년 전북 장수 출생
1982년 2월 부산 아미 초등학교 졸업
보세공장 취업으로 노동자생활 시작함
1985년 공장생활을 하면서 동주여자중학교 야간 졸업
1990년 (주)대봉에서 미싱공으로 근무
1991년 12월 6일 (주)대봉 3층 옥상에서 살인적인 노동문제에 항거하여 투신
양산 솥발산 공원 묘역에 안장
지역 노동자들의 독서모임인 ‘도서원 광장’에 나가면서 노동자의 의식에 눈을 떴고, 자랑스런 노동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던 권미경 동지는 신발업체인 대봉에서 91년 11월부터 어용노동조합의 협조 속에서 30분 일 더하기 운동, 구사운동과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노동통제강화에 맞서 공장 옥상에서 투신,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다음은 팔뚝에 쓴 유서 전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땅에 묻지 않고 그대들 가슴 속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미경이다.”
no3
김 경 숙 (당시 21세)
1958년 6월 5일 전라도 광산군 출생
1973년 서울로 상경,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
1976년 8월 30일 YH무역(주) 입사
1977년 6월 녹지야학 입학
1978년 3월 YH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선출
1979년 3월 30일 YH무역(주) 일방적 폐업공고 발표로 YH 사건 시발
4월 13일 YH 노조 폐업철회 공장점거 농성
5월 YH노동조합 조직부 차장으로 피선
8월 9일 신민당 당사 점거 농성
8월 11일 새벽 2시 2천여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동맥끊고 투신, 운명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김경숙 동지가 근무하던 YH무역은 수십 억의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폐업을 자행하는 회사였다. 이러한 YH무역의 폐업에 맞선 노동자들은 신민당사 농성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를 등에 업고 가혹한 탄압을 진행하는 공권력의 위협은 동지를 투신하게까지 만든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라는 동지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YH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이 본디 강인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권과 단결권을 지키기 위해 착취당해 왔던 소극성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YH 노동조합의 투쟁은 민주노동조합을 파괴하는 악덕자본가와 이를 비호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투쟁이었으며, 결국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18년에 걸친 박정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no6
김 낙 성 (당시 39세)
1955년 12월 3일 충북 음성 출생
1975년 12월 19일 용산공업고등학교 통신과 졸업
1991년 5월 한국통신노동조합 개혁모임에 참가
1992년 4월 서울지방본부 대의원 피선
1992년 5월 민주개혁그룹 대의원 다수 확보 활동
1992년 7월 서울지역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결성
1993년 3월 조합집행부의 징계기도에 맞서 저지 투쟁 전개
1993년 11월 전국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결성
1993년 12월 복지후퇴 및 직선제 사수 투쟁위원회 결성
1994년 4월 17일 백혈병으로 운명, 금촌 기독공원묘지에 안장
김낙성 동지는 미아전화국 창동분국 시절 기독교 신우회 활동 등을 통한 성실함으로 조합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91년 4월의 대의원 선거에서 어용지부장을 제치고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동지는 자신을 택해준 조합원들에게 실망을 주지않기 위해 열심히 활동을 해나갔다. 동지는 이후 91년에 어용노동조합의 부당간섭에 항의하는 등 농성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다. 동지는 어려울 때 노동조합 민주화추진위원회를 확대, 강화하여 투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일으켜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93, 94년에는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여용산별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공작을 펴는가 하면, 위원장, 지부장 임기를 3년 연장하는 등의 한국통신 노사 양측의 반민주적 음모에 맞서 모든 정신과 육체를 민주노동조합 사수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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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 환 (당시 53세)
1938년 12월 11일 출생
1977년 12월 22일 원진레이온 입사 (원액2과 근무)
1990년 9월 퇴사 후 쓰러져 말을 더듬기 시작
1990년 11월 26일 사당의원에서 이황화탄소 중독 및 고혈압 진단받음
1990년 11월 27일 노동부와 회사 측 요양신청 거부
1991년 1월 5일 노동부로부터 요양신청서 접수 통보받음
1991년 1월 5일 오후 1시경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밤 10시 30분경에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김봉환 동지는 77년 원진레이온에 입사하여 성실한 노동자로 일했으나 입사 후 차츰 몸이 쇠약해지더니 급기야 CS2 중독 초기 증상인 두통과 소화불량, 손발이 저리는 등의 증상으로 83년 원진레이온에서 퇴사하였다. 그후 건물 경비 등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던 중 두통, 마비증세에 시달리다 89년에 쓰러져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하여 90년 10월 진료를 받아본 결과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및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자기의 병이 직업병임을 안 동지는 원진레이온 회사측에 산재요양을 요구하게 되었으나, 진단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요양신청을 해줄 수 없다고 거절했고, 노동부 또한 회사를 두둔하며 접수조차 거부하였다. 동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인 싸움으로 마침내 91년 1월 5일 노동부로부터 요양신청서를 접수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바로 그 날 운명하였다.
no6
김 상 옥 (당시 33세)
1961년 1월 7일 서울 출생
1980년 서강대학교 문과대 입학
1983년 민주화시위 주도로 구속
1984년 노동현장에서 일함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대중모임 ‘대나무’ 활동
1986년 구로 동일기업 노조설립 투쟁으로 구속
1988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편집위원
1990년 민족민주운동연구소 노동분과 국제분과 연구원
1991년 서강대학교 민주동문회 사무국장
1992년-93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홍보부장
1994년 2월 19일 위암으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김상옥 동지는 80년 서강대 문과대학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4학년에 들어설 무렵 군입대를 하루 앞둔 3월 24일 시위 주도로 구속되었고, 83년 12월 출소한 김상옥 동지는 노동운동을 고민하게 된다. 첫 발을 들여놓은 곳은 농약을 포장하는 회사였고, 지독한 농약냄새를 마셔가며 처음으로 힘든 노동을 하게 되지만 동지는 즐겁게 생활했으며, 우연히 구로공단 내 선진적인 남성노동자들을 양성하는 조직, ‘대나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동일기업에 입사하여 노동조합설립을 위해 싸우다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되어 두 번째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석방된 뒤 한국민주노동자연합, 남부지역금속노동조합에 참여하였고 다시 철공장에 취업하였으나 작업 중 허리를 다쳐 디스크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후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서강대 민주동문회에서 활동하였으나 위암으로 인해 운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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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성 애 (당시 18세)
1986년 9월 12일 진흥요업에서 작업 중 화공약품에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
1987년 11월 3일 산재 중앙병원에서 산재없는 세상을 염원하며 투신, 운명
부평공원묘지에 안장
김성애 동지는 86년 9월12일 진흥요업(인천 주안동)에서 작업을 하던 중 작업장내의 인체에 해로운 화공약품에 의식을 잃고 기절하여 뇌진탕으로 반신불구가 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는 보상은 커녕 동지의 모친과 외숙을 불러놓고 동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며 거짓말로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였고, 가족을 협박하여 산재처리를 해줄테니 추후 어떤 법적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강요한 뒤 도장을 찍게 하였다.
이렇게 회사측으로부터 고통을 받던 동지는 인천 산업재활원에 입원 중 87년 11월3일 오후 4시10분경 병원 7층에서 산재없는 세상을 염원하며 투신, 자살하였다. 김성애 동지는 꽃다운 18세의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no6
김 성 윤 (당시 62세)
1932년 10월 강원도 철원군 출생
1971년 택시업계에 입사
1980년 7월 상호운수주식회사 입사
1986년 12월∼1992년 12월 상호운수노동조합 선거관리위원장과 고문 역임
1994년 1월 오전 5시 잘못된 택시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드리는 탄원서”를 작성하고 자결
‘잘못된 택시제도의 개선’을 외치며 운명한 김성윤 동지는 질곡의 삶을 평생의 업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15만 택시노동자들 모두의 죽음이었다. 동지는 14년간이나 상호운수에 근무하면서 단 한 번의 무단결근도 하지 않은 성실한 택시노동자로 동료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으며, 보증금 1천만원에 월 45만원의 사글세방에 살면서도 딸을 대학원에 보낼 정도로 헌신적인 가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평범한 노동자이자, 가장 열심히 살아왔던 노동자는 말뿐이고 변하지 않는 정권의 택시정책에 분노하며 “김영삼 대통령에게 드리는 탄원서”를 작성하고 자결, 운명하고 말았다.
no6
김 수 배 (당시 28세)
1959년 6월 19일 부산 출생
경남공업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졸업
1986년 6월 고려화학 입사, 살란트 기술부 근무
1987년 8월 노동조합 사무장
1987년 10월 16일 오후12시 40분경 자재 창고 앞에서 분신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는 고려화학에도 번졌다. 노동조합 사무장으로서 헌신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던 김수배 동지는 어려운 투쟁의 과정에서 동지들에게는 굳건한 믿음이 되었고 사측에서는 누구보다도 두려운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노동조합에서 조합비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사무장이 일괄해서 대리서명하였던 것을 한 노동조합원이 경찰에 고발하는 사건이 발행한다. 철저히 배후를 숨긴 채 자행되는 치밀한 탄압과 회유에 시달리던 동지는 사직까지 고민하게 되었고 소환마저 당하게 되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으나 이것이 노동조합를 탄압하기 위한 사측의 조작극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김수배 동지는 그 누구도 감당치 못할 커다란 짐을 어깨에 잔뜩 짊어진 채로 자재창고에서 불을 당긴 후 창고 앞으로 뛰어나가 쓰러져 투쟁의 불길로 솟구쳤다.
no6
김 시 자 (당시 35세)
1961년 10월 8일 전북 김제 출생
1984년 2월 경기 간호전문대 졸
1984년 3월 한국전력부속병원 입사
1989년 3월 전력노동조합 한일병원지부위원장 피선
1993년 3월 위원장 재선
1996년 1월 13일 분신,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노동조합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일해나가면서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순리적으로 하나씩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던 김시자 동지. 그런 동지에게 최태일 어용노동조합 집행부는 1월 7일 ‘규약위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사유를 내걸고 징계위원회 개최와 출석을 통보하였다. 1월12일 오후 2시경, 경주 보문단지 내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전력노동조합 54차 중앙위원회는 첫번째 안건으로 김시자 동지와 오경호 동지(광주전력지부 위원장) 2인에 대한 징계를 결의할 예정이었다. 최태일 집행부의 짜여진 각본대로 징계가 이루어지기 직전, 김시자 동지는 변론을 통해 “징계는 부당하다”, “이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된다”, “이런 상태로 그냥 있으면 노동조합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말을 남긴 채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동지는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채 불덩어리가 되어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운명하였다.
no6
김 왕 찬
m
김 윤 기 (당시 25세)
1964년 12월 18일 서울 출생
1983년 3월 국민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1986년 5월 5·3 인천 투쟁에 참가하여 구속, 1년형을 선고받음
1988년 7월 덕진양행 입사
1988년 11월 29일 덕진양행 노동조합 결성, 위원장으로 선출됨
1989년 4월 23일 협상 결렬에 항의, 분신
파주 금촌공원 묘역에 안장
김윤기 동지는 동료들과 함께 열악한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어 회사측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사측의 야비하고 무성의한 태도로 협상은 계속 결렬되었고, 공장장과 구사대는 조합원을 구타, 폭행하고 노동조합집단 탈퇴 음모를 조작하고 업무집행방해 및 퇴거불응명령으로 고발하는 등 숨막히는 탄압을 자행, 급기야 1월 중순에는 ‘공장이전’이라는 신종 노동조합탄압을 성남지역에서 최초로 휘두름으로써 민주노동조합의 생명을 끊어 놓으려 하였다. 이에 덕진노동조합은 동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 2월 16일부터 파업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이후 교섭 결렬이 계속되자 이에 격분한 동지는 몸에 신나를 끼얹고 항의 분신하였고, 병원으로 옮기는 중 운명하였다
no6
김 장 수
1987년 6월 15일 인천 경기교통 노동조합 조합장 활동 중 해고
1988년 3월 1일 오후 8시경 회사내의 부당해고에 맞서 단식 농성 중 분신
1988년 3월 9일 전신 70%, 3도 화상을 입고 오후 8시 15분 운명
인천 경기교통 노동자들은 87년 김장수 동지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고, 동지를 조합장으로 피선하였으며 근거없는 노동조합 총무 해고 조치에 대해 파업농성을 벌여 단체협약을 따내기도 했다. 그러자 회사는 노동조합를 파괴하기 위해 조합내부의 분열을 조장하여 김장수 동지와 공석용 동지를 해고예고조치 하였고, 이에 두 동지는 민주노동조합를 파괴하기 위해 자행된 해고는 부당하다며 항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김장수 동지는 회사에 단식농성하기 위해 갔다가 3월 1일 분신하였다.
평소 동지는 조합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 왔었던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부인 이현숙씨는 “남편 몰래 부어 오던 적금까지 해약하며 노동조합활동을 뒷바라지해 왔는데…”하면서 남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동지의 죽음 이후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도 빈소를 지켰던 동료들과 유가족들의 힘으로 마침내 회사측에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no6
김 종 수 (당시 23세)
1966년 3월 21일 전북 장수군 출생
1979년 빈암중학교 입학, 3년 중퇴
1985년 서울 상경, 동대문 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함
1988년 7월 31일 (주)서광 구로공장에 입사
1989년 1월 쟁의부장 임명
1989년 4월 18일 노동운동 탄압분쇄, 임금인상 완전쟁취,
서광 구로지구의 독자적 운영 쟁취 등을 내걸고 파업시작
1989년 5월 4일 오후 1시 15분경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 “동지들을 탄압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
밤 11시 30분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서광 구로지부는 89년 4월 4일, 어용노동조합가 지부노동조합 임원 4명을 제명시키는 등 탄압을 노골화하자 준법투쟁을 통해 자주적 조합활동의 보장과 제명철회를 요구하였다. 준법투쟁 12일째, 지부간부 5명이 삼미노동조합에 연대방문을 갔다 오던 중 강제연행되자,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은 4월 18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하였다. 계속되는 파업 속에서 5월 4일, 회사측이 구두로 합의한 전날의 교섭을 번복하자 이에 격분한 쟁의부장인 김종수 동지는 “민주노동조합 사수하자” “셋방살이 노동자의 서러움은 싫다” “동지들을 처벌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김종수 동지는 밤 11시30분경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공안정국의 ‘무노동 무임금’ 논리와 회사, 본조의 지부탄압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영원히 우리곁을 떠나갔다.
no6
김 종 태 (당시 22세)
1958년 6월 7일 부산 초량동 출생
1973년 서울 삼진 특수철 입사
1974년 소그룹 형제단 창단
1975년 8월 중학 졸업자격 검정고시 합격
1976년 3월 제일 산업중학교 졸업
1977년 12월 금마실업 감원 퇴사
1979년 5월 제대 후 조나단 독서회 조직
1980년 6월 9일 오후 5시50분 경 이화여대앞에서
노동3권 보장과 광주학살 의분을 호소하는 전단을 배포하고 분신,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김종태 동지는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사판과 공장을 떠돌며,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 동지는 77년부터 교회 청년들과 함께 전태일 추모회를 하는 등 동일방직사건에 지원세력이 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79년 9월 12일 YH 사건 이후 “한울 야간학교” 교사들이 경찰서로 연행되고, 학생들이 강제 해산되고, 그렇게 기다리던 민주주의가 광주학살로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분연히 일어나 신촌 이대 앞 사거리에서 “우리는 어떠한 책동도 용납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분신하여 광주영령들의 민주화 투쟁에 온몸으로 함께 했다.
no6
김 종 하 (당시 28세)
1961년 8월 전북 순창 출생
1978년 동계중학교 졸업
1979년 서울 성동구 시티즌 시계 입사
1985년 인천 경동산업 입사
1987년 8월 17일∼30일 경동 노동조합 민주화투쟁 파업에 참여
1989년 4월 임금인상 대책위원으로 활동
1989년 5월 <디딤돌>친목회에서 적극적 활동
1989년 8월 31일 ∼ 9월 4일 <디딤돌> 친목회 임원에 대한 부당한 징계에
항의하여 농성투쟁 중 분신
1989년 9월 15일 한강 성심병원에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89년 9월 4일 인천 주안5공단에 소재한 경동산업에서 노동자 5명이 집단 분신 할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산재, 노동조합집행부의 어용성, 대량해고 등 노동자들의 탄압에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경동산업은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위해 조합원들로 구성된 친목단체 ‘디딤돌’ 회원들이 8월 투쟁 2주년을 기념하고 9월 대의원 선거에 앞서 단결을 모도하기 위하여 일일 찻집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노동자들을 징계에 회부하였다. 21명이 복지관 4층 옥상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으나 회사측은 구사대를 동원하여 농성 노동자들을 고립시켰으며, 지원나온 가족들과 해고 노동자들을 실신할 정도로 집단 폭행하는 등 사태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런 상황속에서 최종 협상을 위해 노무이사와 담판을 하러 갔으나 ‘징계를 받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격분시켰고, 급기야 동지들은 분신, 할복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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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 리 (당시 29세)
1964년 2월 전남 목포 출생
1982년 이화여대 정외과 입학
1989년 우진상사, 진영물상입사
1992년 해고자들과 함께 미모사 설립
1993년 7월 미모사 근무 중 화상, 한강성심병원에 입원
1993년 8월 8일 화상 후유증으로 운명
김주리 동지는 이화여대를 다니며 현실의 모순을 알게 되었고, 졸업 후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 노동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미싱을 배워 취업하였다. 부평 공단과 주변 봉제공장에서 활동하다 해고 당한 후 동료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생산 공동체를 만들었다. 동지가 죽기 전 모든 것을 바쳤던 ‘미모사’는 가장 긴 시간을 일하면서 가장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인간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봉제공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동조합 결성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생계를 해결하고 스스로 주인되는 공장을 이루기 위한 생산 공동체이다. 동지는 ‘미모사’에서 작업 중 화재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지들의 품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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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 수 (당시 22세)
1949년 7월 6일 전북 임실군 장사면 출생
1967년 12월 안양고 2년 중퇴
1968년 8월 15일 ㈜한영섬유 입사
1971년 3월 18일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구사대에게 피습당해 사경을 헤맴
1971년 5월 17일 운명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한영섬유 노동자들은 70년 12월 노동조합을 결성, 회사측의 부당 노동행위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노동조합 측이 쟁의발생신고를 하게된다. 이에 회차측은 구사대를 만들어 공포분위기를 조성했고, 3월 18일 오후 3시경 작업 중 만취 상태로 노동자들을 폭행하다가 적극적으로 노동조합일을 하던 김진수 동지를 건물 옥상으로 불러 드라이버로 머리를 2.5cm 가량 찌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고 이후에 유가족은 노동조합 활동보장과 단체협약 체결과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회사측은 한 노동자의 생명의 가치를 헐값으로 처리하려 맞서며 한 달이 더 지나 시신이 썩어가도록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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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처 칠 (당시 35세)
1956년 2월 강원도 인제군 출생
1976년 중앙 고등학교 졸업
1982년 화창운수 입사
1985년 합동물산 입사
1990년 합동물산 노동조합장 당선
1991년 5월 조합장 재선
1991년 8월 22일 오후 12시 30분경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90년 8월부터 시작된 합동물산 노동조합의 지·도급제 철폐 투쟁은, 1년여의 과정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악덕 기업주의 파렴치한 부당노동 행위에 맞서 굳은 결의와 동지애로 노동조합를 이끌던 김처칠 동지는, 91년 7월 10일 차고지가 없어 성산대교로 그리고 장마로 다시 양화대교 다리 밑으로 이전하면서 택시 노동자의 권익과 생존권을 위해 하루 세끼 밥도 먹지 못한 채 한달여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선봉에서 온몸 아끼지 않고 투쟁하였다. 8월 22일, 조합원들이 축구를 하다 한강에 공을 빠뜨리자 때마침 한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동지가 공을 건지겠다고 들어갔으나, 투쟁으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관계로 중간에 탈진하여 행주대교 근처에서 시신을 인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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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 욱 (당시 21세)
1966년 3월 20일 인천 출생
1985년 운봉고등학교 졸업, 진흥요업 근무
1986년 해군 방위병으로 입대
1987년 6월 민주화대투쟁 적극 참여
1987년 8월 1일 사랑방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참여,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대학을 포기하고 곧장 취업을 한 김현욱 동지는 지긋지긋한 노동조건과 기계같은 생활의 반복 속에서 우리 사회가 모순을 느끼게 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86년 가톨릭 노동사목회에서 주최하는 자기발견 교육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싸움들 속에서 자본의 본질과 노동자의 단결에 대해 보다 풍부하고 실천적인 습득을 이루어내었다. 그러한 가운데 임금인상투쟁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한다. 의리를 생명으로 여겼던 동지는 87년 7월말 군복무 중 휴가기간을 맞이하여 수련회에 참가하였다가 물놀이에서 죽어가는 동지를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물에 빠진 동지를 구하고, 짧고 굵은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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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타원 데레사
(당시 11세)
1985년 10월 2일 진주 수곡 출생
진주 동진초등학교 5학년 재학
1996년 11월 10일 전국교사대회 및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전복 사고로 운명
경남 고성군 상리 이화공원 묘역에 안장
1996년 11월 10일 타원이는 아빠(류경렬, 전교조 조합원, 같은 사고 중상을 당함)의 손을 잡고 전국교사대회 및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갔습니다. 진주에서 열리는 전교조 집회에는 아빠와 함께 늘 참석하여 “우리 아빠를 복직시키라”며 조그마한 손 불끈 쥐고 목청껏 소리치던 타원이. 그 예쁜 타원이가 사랑하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전교조를 뒤로 하고 먼저 가고 말았습니다. 채 피지도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한 류타원 데레사 어린이는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있는 참교육, 참세상의 아름다운 꽃봉우리로 기억될 것입니다. ‘5학년 타원이가 그리던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학교, 이제 그 밑그림 위에 우리의 색깔을 칠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정녕 이렇게 가실 수는 없습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참교육 손수건을 대나무 깃대에 묶어 가을 하늘 향해 흔들며 우리가 살아 갈 참세상을 꿈꾸어 보던 타원이를 차마 이렇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사고 당시 정해숙 전교조 위원장의 추모사 중)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예쁜 딸 류타원(데레사) 여기 잠들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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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송 면 (당시 15세)
1973년 충남 서산 출생
1987년 12월 5일 야간공고 진학을 위해 영등포 협성계공(주)에 입사
1988년 2월 8일 휴직계 제출
1988년 3월 14일 수은중독 진단받음
1988년 4월 7일 노동부 서울 남부지방사무소에 산재요양신청서 제출
노동부, 산재요양신청서 처리지연
1988년 6월 29일 여의도 성모병원 직업병과로 전전함 점차 악화
1988년 7월 2일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87년 12월 영등포 소재 협성계공에 입사한 문송면 동지는 놀랍게도 불과 2개월만에 수은중독 증상을 보여 6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지는 이 회사에서 압력계 커버의 신나세척, 페인트칠, 온도계의 수은 주입작업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수은 중독으로 불면증, 두통, 허리와 다리의 통증 등의 증세가 나타났으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전신발작으로 악화된 후 4군데의 병·의원을 전전하고서야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및 유기용제 중독 진단을 받았다. 이 진단에 따라 가족들은 4월 7일 노동부에 산재요양신청서를 냈으나 회사의 방해에 놀아난 노동부는 10일만에 산재요양신청서를 반려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이 일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게 되고 6월말에야 요양승인이 나오게 되었지만 산재 지정병원으로 옮긴지 이틀 만에 문송면 동지는 운명하고 말았다. 산업재해에 대한 변변한 대책이 없었던 노동현실이 만 열다섯살의 동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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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용 섭
1986년 10월 서울 동대문구 망우리 광무택시 입사
1988년 6월 9일 구사대의 폭행으로 운명
문용섭 동지는 가난하게 살아 왔으면서도 의롭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회사 관리자들에게 바른 말을 잘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모든 일을 책임지고 동료들에게는 부담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회사 과장들이 힘없는 기사들에게 각종 구실로 돈을 뜯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이 사실을 낱낱이 자신의 수첩에 기록하여 폭로함으로써 회사의 비리를 바로잡겠다고 별러 왔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문용섭 동지는 일을 나가지 않고, 1,000원을 입금으로 잡아놓고 노용운 과장에게 ‘노부장과 회사의 비리를 밝힐 수 있게 2주일간의 휴가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이날 회사 부장과 동지는 회사 비리와 문 동지를 해고시킨다는 소문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말다툼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회사측 사람의 공격에 의해 뒤로 쓰러지면서 포장마차 문 밖 보도로 쓰러져 뒷머리를 보도에 부딪혀 실신, 병원으로 옮겼으나 두 개골 골절상으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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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문 곤 (당시 33세)
1963년 12월 28일 통영 비진도 출생
경상대학교 사범대 과학교육과 졸업
삼천포 공업고등학교 재직
1996년 11월 10일 전국교사대회 및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전복사고로 운명
경남 고성군 상리 이화공원 묘역에 안장
1996년 11월 10일 박문곤 동지는 전국교사대회 및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대회장 안에는 40만의 교사와 천만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열기가 뜨거웠다. “1997년 전교조 합법화 원년”이라는 글씨가 창공에서 나부끼고, 노동악법 철폐를 결의하는 힘찬 목소리가 가득했다. 이렇게 노동자대회를 잘 치루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박문곤 동지를 비롯한 전교조 교사와 가족을 태운 관광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차안에는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쏟아낸 피로 얼룩졌고, 밖에는 손목, 뼈토막, 뭉개진 살이 널려 있었다. 이 사고로 인해 박문곤 동지와 류타원 어린이가 그 자리에서 운명하였다.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 참교육이 꽃피는 합법화 시대를 끝내 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no6
박 미 경 (당시 26세)
1967년 6월 대구 출생
1985년 2월 대구 경명여자고등학교 졸업
1989년 2월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업
영남대 노래패 <예사가락>에서 활동
1989년 8월 대구 심인중학교 영어강사로 근무
1991년 2월 부당해고
1993년 2월 전교조 대구지부 학생부장으로 활동
1993년 6월 26일 오후 4시20분경 약 2개월간 동안 암으로 투병하다 운명
영남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대구 심인중학교에서 영어강사로 재직하며, 참교육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던 박미경 동지는 1991년 부당해고를 당하고 만다. 그러나 동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93년 전교조 대구지부 학생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참교육, 참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던 중 1993년 6월 26일 2개월동안 암으로 투병하다 안타깝게 운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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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복 실
1971년 김제 용지중학교 졸업 , 태창 메리야스 입사
1979년 가톨릭 노동청년회 활동
1981년 태창 메리야스 노조위원장으로 당선, 민주노조 활동을 전개
1982년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간부 7명과 함께 해고를 당함
1983년 해고 후 이리 광전자에 입사 했으나 또 해고를 당함
1985년 군산 경성고무 입사, 해고
1987년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
1990년 전북노련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
1991년 6월 위암수술 받고 8개월간 투병생활
1992년 3월 운명
태창 메리야스에 입사한 동지는 가톨릭 노동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억압된 노동자의 삶을 바꾸려 노력하였고, 81년 노동조합위원장으로 당선되어 전북지역 최초의 민주노동조합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의 노동조합 탄압이 포악해지면서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간부 7명과 함께 해고를 당했고 이에 노동조합 탄압 중지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동료들과 함께 9일간의 단식농성 투쟁을 벌였다. 박복실 동지는 해고 후 83년 이리 광전자, 전주 원일택시 운수 노동자, 군산 경성고무 등에서 일했으나, 또 다시 해고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로 인해 어디를 가도 취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동지는 87년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여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시 전주지역 민주노동조합 건설을 지원하였고, 90년 전북노련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으나 91년 6월 위암수술을 받게 되었고 8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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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삼 훈 (당시 40세)
1955년 경북 영덕군 출생
1971년 영해 중학교 졸업
1982년 대우조선 입사, 특선수 선장탑 근무
1995년 6월 21일 분신 후 투신, 운명
경북 영덕에 안장
박삼훈 동지가 근무하던 대우조선은 신경영 전략으로 현장의 노동통제를 통해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개인의 사생활까지 감시, 감독하는 인간말살 정책을 펴왔으며 단체교섭에서도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러한 회사측의 살벌한 노동통제와 노무관리 아래 노동자들은 호봉 하나, 잔업특근 하나에 동료와 경쟁하고 눈치보며 서로 감시자가 되어야 했고, 조합원의 정당한 권리인 집회 참석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강요 당해야 했다. 회사측의 이러한 부당한 탄압에 맞서 6월 21일, 12시20분경 박삼훈 동지는 특수선 본관 사무실 옥상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후 투신해 대우병원으로 긴급 후송했으나 12시 58분 끝내 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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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성 호 (당시 29세)
1961년 11월 25일 강원도 태백 출생
1980년 태백 철암고등학교 졸업
1989년 7월 1일 안산 금강공업(주)에 입사
1990년 8월 10일 노동조합 결성시 부위원장으로 선출됨
1990년 8월 30일 경찰의 진압에 의해 분신, 전신 70% 화상
1990년 9월 11일 오후 7시 45분경 운명
90년 8월 30, 금강공업(주)은 경영부실을 이유로 무기한 휴업공고에 금강공업 노동조합은 농성에 돌입하였고, 이에 안산 경찰서 정보과장이 농성장에 와서 협박을 하고 돌아갔다. 그러던 중 공권력이 투입되어 경찰들이 조합원들을 에워싸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조합원앞으로 경찰이 계속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자 박성호 동지(부위원장)가 생수통에 담겨 있는 신나를 몸에 붇고 “더이상 가까이 오면 분신하겠다”고 하자 경찰 현장책임자가 신나통을 손으로 치면서 주변에 있던 조합원들의 몸에 뿌려졌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원태조 동지 (후생복지부장)도 온몸에 신나를 끼얹었다. 이때 라이터를 들고 있던 부위원장의 손을 낚아채면서 순식간에 원태조, 박성호 동지가 불덩이로 변했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경찰은 소화기를 뿌리며 조합원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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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영 진 (당시 26세)
1960년 4월 9일 충남 부여 출생
1976년 배문 중학교 중퇴 후 어렵게 생활
1984년 1월 ㈜동도전자에 입사
7월 ㈜동일제강에 입사
1985년 9월 18일 ㈜신흥정밀에 입사
1986년 3월 17일 임금투쟁 중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외치며 분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동일제강 민주노동조합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해낸 동지는 신흥정밀에 입사하여 부당노동행위 및 임금착취에 대한 항의 중 해고 철회 투쟁을 벌이다가 공권력이 투입되자 경찰과 회사측의 폭압에 맞서 “근로기준법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하였다. 동지는 병원에서도 “전태일 선배가 못다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경찰은 동지의 시신을 탈취하고 유가족을 협박, 화장을 감행하여 한줌의 재로 변해 인근 야산에 유해를 뿌렸으나 그 직후 동료들이 수거하여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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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용 선 (당시 20세)
1967년 10월 16일 강원도 홍천 출생
1983년 동인천 중학교 졸업
1985년 한국릴레이 근무
1987년 백마교회 문화잔치 2기생 졸업
1987년 8월 1일 백마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참여,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박용선 동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한 채, 낯설고 낯선 공장문을 16살의 어린 손으로 두드렸다. 그러던 그는 <살아온 이야기>라는 노래를 배우고자 백마교회 문화잔치 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면서 이 사회와 우리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올바르게 알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동지는 4·19강연을 듣고는 “저렇게 어린 국민학생도 악의 무리에 항거해 싸워왔는데 나는 무엇을 했나”라며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고, 87년 6월투쟁을 통해 그 고민은 더욱 깊어져갔다. 그러던 중 어머님의 병환, 곧 있을 군입대에도 불구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고민하는 친구들과 함께 하기 위해 수련회에 참석하였다가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다가 목숨을 바쳤다. 동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죽음을 택했던 진실된 동지애는 어두운 곳에 햇살로 비춰주듯 동지들을 정화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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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응 수(당시 28세)
1959년 12월 1일 대전 계룡공업고등학교 졸업
경북 왜관에서 카츄사로 군복무
1982년 6월 투라가구(주)에 입사하여 성실한 노동자로 생활함
1987년 12월 5일 ‘후보단일화 하라’고 절규하며 대전역 앞에서 분신
충남 대덕군 산내면 하소리에 안장
박응수 동지는 대통령선거가 종반에 접어들면서 야권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민중의 시위와 야당 당사내 농성, 서명운동이 잇따르고 있던 87년 12월 5일, 대전역 앞으로 버스를 몰고가 경찰과 대치 중 “후보단일화 하라”고 절규하며 버스와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산화하였다. 분신 직후 정권의 재집권에 광분한 살인정권은 열사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조문객들에게 위협적인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그의 의로운 죽음을 지키겠다고 몰려온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공권력을 동원, 강제 연행하는 등 동지의 유가족과 강제 분리하여, 시신을 강제로 탈취하고 충남 대덕군 산내면 하소리에 삼엄한 경비하에 야밤 도둑 매장을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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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종 만 (당시 36세)
1948년 2월 부산 출생
1968년 서라벌 고등학교 3년 중퇴
1982년 10월 ㈜민경교통(현 동명택시) 입사
1983년 3월 노동조합 복지부장으로 일함
1984년 11월 30일 “내 한 목숨 희생되더라도 더 이상 기사들이
피해 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일산 기독공원 묘소에 안장
(주)민경교통 노동자들은 1984년 11월, 노동조합 일로 자주 승무를 못한 사무장을 무단결근 등의 터무니없는 구실을 붙여 해고시킨 회사측에 분노하며 11월 27일 해고 음모철회를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29일부터 박종만, 배철호, 안을환 동지가 단식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이어 11월 30일 노동자들이 해고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 전무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3인을 해고하겠다”고 위협을 당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박종만 동지는 동료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사무실에서 밖으로 뛰어나오며 “노동조합 탄압말라, 사무장을 복직시켜라,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라”고 외치며 분신하여, 오후 8시 30분경 숨을 거두었다.
no6
박 진 석 (당시 20세)
1967년 전북 고창 출생
1983년 영선중학교 졸업
1984년 인천 직업훈련원 수료, 대우조선 입사
1988년 진주 방송통신등학교 입학
1989년 5월 29일 구사대 가입을 강요하자
‘노동자와 노동자간의 싸움을 유발시키지 말라’며 항의하며 분신·투신
1989년 6월 4일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대우조선은 노동자들간의 분열을 조장하고자 ‘상록회’라는 구사대를 조직하였다. 5차교섭까지 시도하였으나 회사는 ‘임금동결 아니면 폐업하겠다’며 종래의 입장에서 한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29일, 박진석 동지는 반장이 나눠준 구사대 조직 ‘상록회’ 가입 신청서를 찢어 버리고, “더이상 노동자와 노동자간의 싸움을 유발시키지 말라”, “회사는 더 이상 노동자를 분열시키지 말라… 회사에서는 임금동결을 하려고 온갖 음모를 꾸미는 데 임금동결을 하면 어떤가를 보여주겠다..”며 분신하였고, 투병 중에도 “사용자는 각성해라 나는 죽지 않는다. 승리의 그날까지..”를 외치며 물러섬이 없었지만 89년 6월 결국 운명하였다. 이러한 박진석 동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분노하던 이상모 동지 또한 이날 밤 10시 40분경 기숙사 옥상에서 분신투신하였다.
no6
박 창 수 (당시 33세)
1958년 7월 28일 부산 출생
1979년 2월 부산 기계공업고등학교 졸업
1981년 5월 대한조선공사 (현 한진중공업) 배판공으로 입사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당선 부총연 부의장
1991년 2월 구속, 서울구치소 수감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
5월 6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변사체로 발견됨
양산 솥발산 묘원에 안장
87년부터 노동조합운동에 헌신하였던 박창수 동지는 28년 동안의 어용노동조합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90년 7월 한진중공업에 민주 노동조합을 탄생시키며 전노협과 대기업 노동조합연대회의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해왔다. 동지는 대우조선의 파업 관계로 긴급 소집된 대기업 노동조합연대회의에 참석했다가 제3자 개입금지와 집시법 위반으로 91년 2월초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동지는 임기 중에도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끊임없이 전노협 탈퇴를 종용당하였으며, 안양구치소 수감 중에도 신원미상의 몇 명과 같은 방에서 생활을 하며 계속적으로 안기부의 압력을 받아왔으며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하였고 5월 6일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no6
배 주 영 (당시 28세)
1963년 경북 달성군 출생
1985년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봉화 여자고등학교 부임
1987년 11월 안동교사협의회 창립, 부회장으로 활동.
청송지역 산골을 찾아다니며 조직작업
1988년 12월 청송영양교사협의회 창립, 총무부장
1989년 8월 18일 해임 후 진보에서 자취하며 전교조 활동을 계속함
1990년 2월 19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운명
1991년 2월 23일 유고집 ‘그 숨결 남아 아직 청송길은 푸르른데’ 출간
5년 경북의 봉화여고에서 교직의 첫발을 내딛은 배주영 동지는 모순투성이인 우리 교육현실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헌신과 희생을 통해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동지는 학교 소모임 건설과 청송교사협의회 창립을 위해 뛰어다녔고 88년 12월 청송교사협의회가 창립되자 교협의 살림을 맡아보면서 활동하다 해직되었다. 그러나 동지는 해직의 괴로움을 간직한 채 굳건하게 활동해 나갔다. 밤이면 동지는 참교육 물품을 배낭에 가득 담고 이 산골 저 산골을 누비면서 선생님들을 찾아다녔다. 그 가방 속에는 참교육의 복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끊임없이 탈퇴한 동료교사를 부여안고 구석구석 전교조의 씨앗을 뿌려 나갔다. 그러나 1990년 2월 19일, 청송여중고의 졸업식에 해직된 교사들과 같이 참석하기로 했던 동지는 끝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참교육의 씨앗을 뿌리다 끝내는 동지 자신마저 참교육의 불씨로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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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중 손
대건 고등학교 졸업
구미 금성사 근무
1988년 11월 14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배중손 동지는 가톨릭 신자로 부인과 두 딸과 함께 단칸 월세방에서 성실히 살아왔다. 동지는 87년 8월 12일부터 회사측의 휴업조치 이후 어용노동조합의 민주화와 임금인상 파업농성과정에서 앞장서 싸웠고 구미의 원평성당에 있는 ‘국민운동본부’와 ‘가톨릭 근로자센타’에 상담을 하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회사측에 알려져 배 동지는 부산에 있는 관리자와 함께 며칠간 강제출장 보내졌으며 부산에서 올라온 이후에 다시 9월 5일부터 15일까지 출장명목으로 납치되었다.
납치과정에서 삶에 대한 절망과 회의로 인해 연일 소주로 과음을 하였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 10일간 대구의 신경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해, 휴직계를 냈는데 회사측은 원직복직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약 7개월 만인 5월 5일에야 복직이 되어 자재창고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건당일인 11월 14일 아침에도 웃으면서 출근하였는데 오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로 공장내의 세탁기 안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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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형 진 (당시 38세)
1948년 3월 16일 강화도 삼산군 출생
1961년 강화도 삼산국민학교 졸업
1976년 대성연탄 취직
1981년 택시기사로 취직
1985년 삼환택시 입사
1986년 2월 22일 부당해고 통고, 4월 30일까지 출근투쟁
1986년 4월 30일 오후 2시 30분 경 회사 앞에서 분신 한강
성심병원으로 강제 압송
1986년 5월 1일 6백여명의 전경에게 봉쇄되어 외부와 차단된 채 운명
택시 43대로 115명의 동지들이 일하고 있던 삼환택시는 하루 3교대로 연장수당 한푼없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회사측은 노동운동 탄압에도 혈안이 되어 4월 5일 조합장을 강제 해직시켰으며, 세차비까지 기사들에게 부담시켰다. 이 가운데, 동지는 사장 자가용과 마주쳤으나 뒤로 비키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고 나간 것을 빌미로 사장을 모독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해고당하였고, 이에 반발한 동지는 다음날부터 복직 출근투쟁을 시작하였다. 4월 30일 만약 복직을 안시키면 분신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사장은 오히려 되질테면 되져라고 빈정거리자, 동지는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하기에 이르른다. 회사측은 아무도 모르게 동지를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기고 동지가 이미 죽었다며 가족들에게 함의하기를 공갈 협박했다. 결국 동지는 “미안하다. 하지만 이길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떳떳하게 잘 사는 세상이 와야 할텐데”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no6
서 영 호 (당시 31세)
1962년 3월 1일 출생
1981년 우석고등학교 졸업
1986년 11월 21일 현대자동차 입사
1989년 소위원 가입
1990년 4·28 연대투쟁시 선봉대 활동
1991년 소위원 활동, 노민추 사업부, 3대 집행부 정책연구부장,
교양지 “단결과 전진” 편집위원
1992년 1월 21일 경찰침투 대비 바리케이트 설치 중
차량사고로 해성병원 입원
1993년 7월 1일 오후 9시 26분경 운명
1993년 7월 5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장으로 장례
양산 솥발산 공원 묘역에 안장
서영호 동지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3대 집행부 정책연구부장으로 활동하던 91년 12월 말, 성과분배 정의실현 상여금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현대자동차를 정권과 현대재벌은 공권력으로 짓누르려 하였고 여기에 맞추어 언론에서는 경찰투입이 임박했음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었다. 상용 5공장 조합원들은 최후의 한사람까지 작업장을 사수한다는 결의로 뭉쳐있었고, 동지도 정문을 사수하는 책임자로서 경계근무를 하며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92년 1월 19일 공권력 투입설이 언론을 통하여 선전되면서 긴장감이 가중되기 시작했고 1만 2천의 경찰병력은 회사의 담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동지는 즉각 바리케이트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현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차량바리케이트를 치기 위해 이동하던 불량차량이 동지와 충돌하게 되었다. 동지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불명인 상태로 520여일을 투병하다 끝내 1993년 7월 1일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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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전 근
1995년 9월 4일 운명
95년 9월 4일, 철도청에서는 철도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서전근 동지를 오지로 전출을 보내려 하였다. 이에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인 철도노동자 민주화 운동에서 자신이 굴복하면 안된다고 판단, 대전 철도 공작창에서 분신하였다. 결국 서전근 동지는 철도 민주화를 위해 오지 전출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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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광 수 (당시 30세)
1961년 강원도 삼척군 출생
1982년 강국택시에서 3년간 근무
1986년 인천 공성교통에 입사
1991년 6월 14일 지도부 연행에 항의, 차량시위에 적극 참가
1991년 6월 15일 지도부 석방을 요구하며 분신
1991년 6월 24일 10시 28분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86년 인천 공성교통에 입사해 91년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피선되어 모든 조합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동지는 6월 14일 회사측의 성실한 교섭자세를 촉구하기 위해 벌인 차량시위 당시 경찰들이 폭력적으로 차량을 견인하자 이에 맞서 앞장서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지도부 및 조합원 210여명을 연행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분노한 석광수 동지는 “혼자만 벌어먹고 살려고 하면 하루 갈 것이 일주일 간다”며 열변을 토하고 밤새 북을 치며 노동가를 부르다가 아침 6시 20분경 분신하였다. 권력의 폭력집압과 무자비한 강제 연행에 항의하던 석광수 동지는 사업주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임금협상에 온몸으로 항거한 것이다. 그러나 회사 이사장은 사태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잠적했고 이에 가족들의 보름이 넘는 농성과 노동조합 집행부의 노력 끝에 장례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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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완 희 (당시 29세)
1959년 6월 24일 충북 제천 출생
1974년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 봉제공장에 취업
1986년 10월 태백시 철암동 강원탄광에 채탄후산부로 입사
1987년 8월 파업시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어 파업을 승리로 이끔
1988년 2월 경비직으로 부당 전직 당했다가 투쟁으로 원직복귀
1988년 6월 21일 동료해고자 복직을 위해 시위에 돌입
1988년 6월 29일 노조사무실에서 5명이 단식농성 중
어용노조 대의원의 각목 습격에 맞서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
1988년 7월 8일 원주 기독병원에서 운명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성완희 동지는 1987년 8월, 강원탄광에서 파업을 주동한 후 회사측의 계속적인 탄압에 맞서 싸워왔으며 87년 12월과 88년 2월 두차례나 부당해고를 당했으나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한 바 있었다. 그러나 동료가 자신의 복직투쟁을 도와준 혐의로 해고되자 자신의 일보다 더 열심히 복직투쟁을 전개하였고, 결국 노동부와 지방 노동위원회에서도 복직판정과 복직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강원탄광 측이 이를 거부하자 동지는 동료들과 함께 복직을 위한 단식투쟁에 참여하였다. 단식 8일째인 6월 29일 동지는 동료 5명과 함께 휘발유 1통, 석유 1통을 들고 노동조합사무실에 들어가 사무실을 폐쇄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곧이어 구사대원들이 사무실로 진입을 시도하자 동지는 “들어오기만 하면 분신하겠다”고 말하였으나 구사대원은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하였고 동지는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그었다. 결국 죽음과 싸우다 7월8일 아침 7시20분 끝내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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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철 순 (당시 25세)
1963년 7월 13일 강원도 화천 출생
1982년 인천 신명여자고등학교 졸업
1987년 1월 세창물산 입사
1988년 6월 29일 노동조합 창립과 함께 사무장으로 선출
1988년 7월 15일 ‘파업기금마련 연대집회’ 준비로 현수막 설치 중 추락
1988년 7월 17일 운명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88년 6월 28일부터 세창물산 노동조합은 임금인상과 어용 노사협의회 타도를 위한 싸움을 시작하였으나, 회사측은 휴업조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노동조합 사무장이던 송철순 동지는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과 파업기금 마련을 위한 연대집회를 준비하던 중, 허술하기 짝이 없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현수막을 설치하기 위하여 작업을 하다가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공장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지는 동료 노동자들과 이웃 노동조합원들의 안타까움과 분노 속에 결국 17일 밤 9시45분경, 25세의 생을 마감했다. 다음날 세창물산 건물 벽에는 동지가 걸어놓은 ‘사장놈이 배짱이면 노동자는 깡다귀다’라는 현수막이 마침 내린 비에 젖으며 나부끼고 채 걸지 못한 현수막 ‘노동자의 서러움 투쟁으로 끝내자’가 지붕에 걸려 있었다.
no6
신 용 길 (당시 34세)
1957년 5월 7일 서울 출생
1982년 부산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8년 부교협 문화부장 역임
1989년 7월 전교조 부산지부 결성식에서 축시를 낭송했다는 이유로
구덕고등학교에서 파면
1989년 8월 출근 투쟁을 하던 중 경찰에 연행,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발병한 위궤양으로 병보석
1990년 1월 전교조 부산지부 교과위원장.
1991년 3월 9일 동아대 부속 병원에서 위암으로 35세 나이로 운명
양산 솥발산 공원에 안장
신용길 선생님은 89년 7월 전교조 부산지부에 가입, ‘1989년 한국 여름 그리고 교육 대학살’ 등을 발표하는 등 교육민주화에 앞장서오다 그해 8월 전교조 부산지부 결성식 때 자작 축시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구덕고에서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25일 출근 투쟁 중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데 항의, 단식농성을 벌이다 부산구치소로 넘겨진 이후 위궤양이 악화돼 결국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선생님은 그 뒤 날마다 부산지부 사무실에 출근하며 교육시집 발간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다 위의 통증을 견디지 못해 입원했으나 위암선고를 받게 되었고 결국 운명하였다. 선생님은 운명하기 직전 “눈만이라도 남아 동지들이 복직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라는 유언과 함께 동아대 병원에 두 눈을 기증하였다. 동지의 부릅뜬 두 눈은 앞을 못보는 가난한 뱃사람과 또 한 여인에게 이어져 지금도 변혁과 싸움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no6
신 호 수 (당시 23세)
1963년 8월 8일 전남 여수 출생
1980년 2월 성동중학교 졸업
1983년 8월 검정고시 합격
1985년 6월 방위 근무
1986년 6월 11일 인천시 남구 소재 도화가스에서 근무 중
형사들에 의해 연행된 후 행방불명
6월 19일 전남 여천군 대미산 동굴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변사체로 발견됨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신호수 동지는 1986년 6월 11일 오후 1시 30분경, 인천시 남구 소재 도화가스 충전소에 파견되어 가스통 밸브작업을 하고 있던 중 서울시경 대공수사과 형사라고 신분을 밝힌 3명의 남자에 의해 연행된 이후 소식이 끊겼다가 8일만인 19일 10시경, 3명의 방위병에 의해 고향집으로부터 불과 4km거리인 전남 여천군 대미산 중턱의 한 동굴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동지가 방위근무할 때 장판 밑에 모아둔 북한의 삐라를 문제삼아 대간첩작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장흥공작”이라고 명명하고 동지를 연행한 것이 국회에 제출된 국정감사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사건 당시 여수경찰서는 가족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형사 2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추정하고 변사사건으로 처리해 버렸다. 게다가 1986년 6월 21일, 발견 이틀만에 전남 여천군 돌산읍 평사리 공동묘지에 가매장하고 6월 27일에야 가족에게 통보했다.
no6
양 봉 수 (당시 28세)
1967년 4월 전남 무안 출생
1986년 2월 목포 덕인고등학교 졸업
1990년 10월 현대 자동차 입사 (의장 2부)
1991년 소위원 활동
1992년 2월 성과분배투쟁 관련으로 해고
1993년 1월 원직 복직
1994년 의장2부 소위원회 부의장, 대의원 당선
1995년 2월 의장2부 마르샤 투입 관련 회사측의 합의사항 불이행에 맞서
라인정지건으로 두번째 해고
1995년 5월 12일 공동소위원연합 2기 출범식 참석을 위해
정문 진입시 경비들의 폭력적인 저지에 항거하며 본관정문 앞에서 분신
1995년 6월 13일 대구 동산병원에서 31일간 사투끝에 운명
양산 솥발산 공원 묘역에 안장
봉수 동지는 91년 말 노동조합의 성과분배 요구투쟁에 대항하는 회사측에 의해 1차 부당해고되었다가 93년에 복직되었다. 복직 후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된 동지는 작업강도 조정을 위해 같은 사업부 대의원들과 함께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회사측과의 협상이 계속되어 ‘신차 투입은 대의원들과 합의한 후 실시한다’고 약속하였으나, 이를 파기하였고 동지는 대의원으로서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신차를 투입한 생산 라인을 잠시 중단시켰다. 이를 이유로 동지는 해고당했고, 회사측은 동지를 경비 20여명을 동원하여 정문 밖에 내던지는 폭력을 행사하고 정문출입을 저지하였다.
95년 5월 15일, 동지는 그날도 출입을 저지당했고, 법과 단체협약마저 무시하고 계속되는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온몸에 신나를 붇고 정문으로 들어가려했으나 경비들은 이를 무시하고 집단으로 저지하였다. 이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동지의 몸에 불이 붙게 되었고 결국 운명하였다.
no6
오 범 근
1973년 후지카 대원전기 입사
1976년 프레스공으로 작업 중 손가락 네 개가 잘리는 산재를 당함
당시 4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을 뿐이며 이후 수위로 근무
1988년 3월 10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오범근 동지는 산재 이후 호봉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야간 경비근무 중 옥상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 힘을 지탱하지 못하고 떨어져 골수염으로 무릎뼈를 깎는 수술을 하는 등 노동력을 상실하였으나, 산재노동자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자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88년 3월 7일, “사직강요, 해고 위협, 어용노조 물러가라”, “25% 임금인상, 학자금, 가족수당 쟁취하자”는 요구를 내걸고 파업농성을 벌이던 노동자들이 구사대의 잔인한 폭력으로 해산되자 동지는 10일 새벽 회사로 출근해 같이 근무하는 수위들을 만나 폭력해산의 부당함을 얘기하고 있는데 회사측의 호출을 받자, 항의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4층 관리자실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후 동지는 음독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으며, 그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없이 같은 날 10시20분경에 운명했다. 3월 20일 새벽 5시 30분 동지의 시신은 400여명의 전경이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병원에서 고향으로 옮겨졌다.
no6
오 용 철 (당시 40세)
1956년 1월 27일 출생
1975년 성남고등학교 졸업
1984년 제1회 6급 공채 합격
1988년 5월 서울 개봉전화국 발령
1988년 어용노조 퇴진을 위한 “전민현”건설
1988년-91년 어용퇴진위원장 직선제 관철을 위해
전국적인 ‘노조민주화추진위’활동 전개
1991년 ‘체신부 부당간섭 저지투쟁위원회’결성
1991년 11월 전남 여수 무선전신국 강제발령
1995년 민주노동조합 활동으로 서울구치소 수감
1996년 6월 18일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운명
no6
오 원 석 (당시 52세)
1938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73년 고려대 영문과 졸업
1990년 전교조 경북지부 인천지부로 부터 참교육상 수상
1990년 9월 지병인 간암으로 운명
1992년 4월 18일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에 참교육비 세워짐
오원석 동지는 지병인 간암으로 8년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교육민주화 활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서 경기.인천교사협의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50년을 바라보는 반백의 나이에 뒤늦게 교육민주화운동에 투신, 90년 9월 53세의 현직 조합원으로 영면하기까지 동지는 오직 참교육의 나무를 일구는 것이 꿈이었다. 대학 3학년 때 등록금을 마련 못해 군에 있을 때도 교사의 꿈은 결코 버릴수 없어 예편을 서두르고 서른 여섯의 늦은 나이에 대학에 졸업, 결국 교단에 섰다. 참교육비 제막식에서 동료교사는 추모시를 통해 “책상머리에 붙어있는 밥풀을 뜯어 먹으며 숨조이고, 복종하고, 양심을 파는 동료들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직선의 말이 살아 숨쉬고, 진실이 즐거이 깔린 세상이 올 때까지 마음 비우고 나를 바쳐 섬기라’ 하시던” 이라며 동지의 정신을 기렸다.
no6
원 태 조 (당시 37세)
1953년 7월 7일 출생
1989년 안산 금강공업(주)에 입사
1990년 8월 10일 노동조합 결성시 후생복지부장으로 추대
1990년 8월 30일 경찰의 폭압 진압에 의해 분신, 전신 80% 화상
1990년 9월 18일 오전 6시 30분경 운명
90년 8월 30, 금강공업(주)은 경영부실을 이유로 무기한 휴업공고에 금강공업 노동조합은 농성에 돌입하였고, 이에 안산 경찰서 정보과장이 농성장에 와서 협박을 하고 돌아갔다. 그러던 중 공권력이 투입되어 경찰들이 조합원들을 에워싸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조합원앞으로 경찰이 계속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자 박성호 동지(부위원장)가 생수통에 담겨 있는 신나를 몸에 붇고 “더이상 가까이 오면 분신하겠다”고 하자 경찰 현장책임자가 신나통을 손으로 치면서 주변에 있던 조합원들의 몸에 뿌려졌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원태조 동지 (후생복지부장)도 온몸에 신나를 끼얹었다. 이때 라이터를 들고 있던 부위원장의 손을 낚아채면서 순식간에 원태조, 박성호 동지가 불덩이로 변했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경찰은 소화기를 뿌리며 조합원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no6
유 구 영 (당시 39세)
1957년  출생
1981년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한국신학대학원 입학
1988년  영등포 기계공단 노동조합 사무국장
1990년  대한 중전기 분회장
1993년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정책실장
1995년  민주노동정책 기획실 정책부국장
1996년 5월 2일   새벽 2시25분경 간암으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고려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유구영 동지는 영등포 기계공단 노동조합 사무국장을 거쳐 서노협 선봉대장 및 정책실장으로 활동하던 중 간암에 걸렸음을 알았다. 질환의 성격상 육체적인 무리는 치명적인 것이었음에도 각종 수련회나 교육 등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렇듯 병마와 싸워 나가면서도 활동을 그치지 않고 민주노총 건설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95년 12월부터는 민주노총 정책기획실 정책부국장으로 일하였다. 96년 5월 2일, 병세의 악화로 인해 여러 번의 입원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동지들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에 새벽 2시 25분경, 원숙한 40대의 생애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운명하였다.
no6
유 인 식 (당시 24세)
1963년  7월 인천 출생
1982년  고려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5년  노동현장에서 청년회운영위원으로 활동
1986년  샘터교회 청년회 운영위원으로 활동
1987년  한국기독노동자 인천지역연맹 대표자회의 성원,
6월 대투쟁 적극 참여
1987년 8월 1일   샘터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체육부장으로 참여, 동료를 구하고 운명
유인식 동지는 1982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학내 써클에 가입해서 고교시절부터 생각해왔던 민주화의 대열에 앞장섰으며, 결국 노동자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함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1985년 구로공단 내 금속공장에 들어갔으나, 입사한지 몇 개월 후에 신분이 드러나서 공장을 나와야만 했다. 그 후 1986년 9월부터 인천대 앞에서 사회과학 전문서점 “밀물”을 운영하며 또다른 현장생활을 준비해 샘터교회에 첫발을 내디뎌, 87년 5월 샘터교회 청년회를 만들었다. 그러던 동지는 87년 7월말 수련회에 실무위원회 조직부원으로 참가하였다가 동료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나자 사람과 사람의 손을 연결하여 최선두에 서서 동료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운명하고 말았다. 결국 동지는 자신의 안녕보다는 노동자들의 슬픔을 더욱 깊이 생각했으며, 고인이 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보다는 동지를 더욱 사랑했던 것이다.
no6
유 재 관 (당시 29세)
1962년  서울 출생
1981년  서울 한성고등학교 졸업
1981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입학
1983년  학내시위 주도로 장기간 수배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재입학
1985년  고려대학교 졸업
1987년  인천 신흥목재(현 우아미 가구)에서 활동 중 해고
1989년  인천목재노동자회 실무자로 활동
1990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
남부 노동반 반장 ‘인사연’ 제8차 정기총회 준비위원
1991년  6월 27일 운명
용인 천주교 묘지에 안장
광역의회 선거가 민자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민중운동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이 자행되던 시기에 인천 동서식품에 천 여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였고, 안산의 동영 알루미늄에는 400여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시켰다. 또한 26일 인하대 총학생회장이 교내에서 불법적으로 강제연행되었고, 27일에는 인천대에 160여명의 백골단이 투입되어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던 중 학생들에게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시간에 인천지역 사회운동연합에서 정기총회를 준비하던 회원들은 새벽 1시50분경 인천대 공권력 투입소식을 접하고, ‘인사연’도 침탈당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급히 사무실을 나오다가 유재관 동지가 3층 유리창을 열고 뛰어내렸으나 실족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no6
윤 용 하 (당시 22세)
1969년 전남 승주 출생
1981년 순천 중앙초등학교 5년 중퇴
1983년 노동일 시작
1989년 성남피혁 근무 민주화운동 직장 청년연합 회원 활동
1991년 5월 10일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전남대에서 분신
1991년 5월 12일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윤용하 동지는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어려서부터 중국집 배달원, 가방공장 공원 등의 노동일을 하였다. 89년초 대학 출신 현장활동가를 만나면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관해 인식하게 된 동지는, 서울 민주화직장청년연합의 풍물강습반에 등록해 활동하기에 이른다. 동지는 평소에 망월동 참배를 원했으며 91년 5월에는 5월 9일 국민대회를 맞춰 광주로 갔고, 5월 9일 분신해서 투병 중이던 박승희 동지에게 문병을 가기도 했다.
no6
이 광 웅 (당시 52세)
1940년 전북 이리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
1974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1982년 군산제일고 국어교사로 재직 중 ‘오송회’ 사건에 연루, 6년 감옥생활
1985년 첫시집 <대밭> 출간
1987년 군산 서흥중학교에 복직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
1992년 초대 교육문예창작회장 역임
1992년 12월 22일 오후 4시 45분 지병인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운명
이광웅 동지는 1982년 군산제일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오송회’사건에 연루되어 교사직을 파면당하고 1987년까지 6년동안 옥중생활을 하였다. 동지는 그 와중에도 도서출판 풀빛에서 시집 ‘대밭’을 출간하는 등 민족문학작가 활동을 계속하였다. 감옥에서 나와 1987년 군산 서흥중학교에 복직한 동지는 1989년 전교조 결성과 함께 또 다시 해직되었다. 동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육의 민주화와 민족문화활동을 계속하던 와중에 1992년 지병인 암으로 운명하였다.
no6
이 대 건 (당시 32세)
1956년 6월 16일 경남 창녕군 출생
1978년 상은(주)에 입사
1981년 5월 10일 마산 (주)우성택시 입사
1988년 1월 6일 파업농성 19일째에 협상이 결렬되자
단체 협상 위반에 항의하며 회사앞에서 분신
1988년 1월 8일 부산 복음병원 중환자실에서 운명
경남 창녕군 대지면에 안장
우성택시 90여 조합원들은 87년 11월 24일부터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24개 노동조합 노동자들과 연대파업을 벌여왔는데 성과없이 끝나자 88년 1월 6일 파업 19일째에 임금협상 조기체결 및 단체협약 조항의 이행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여전히 교섭에 소극적이었고 노동조합측의 요구사항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노동조합의 양보만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협상과정을 지켜보던 이대건 동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분신을 감행하면서 조속한 요구수락을 촉구하였다. 평소 동지는 조합활동을 열성적으로 해왔으며 파업시에도 유인물, 벽보제작 등을 도맡아 해오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싸워왔다. 그리고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서도 회장에게 “배가 고파서 죽도록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뭐하러 왔느냐, 보기 싫다. 당장 나가라”고 외치며 분개하는 등 운명 직전까지 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no6
이 대 용 (당시 24세)
1963년 4월 3일 전북 고창 출생
1977년 인천 석남동소재 선학알미늄 입사, 야간중학교 입학
1986년 동양튜브에서 임금인상 30%쟁취 투쟁
1987년 8월 1일 산마루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에 참여,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동지는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 흔들림 없이 싸워나갔으며, 1988년 진흥요업에서 착취와 비인간적 대우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하며 앞으로 이땅, 모든 노동자들이 자기의 위치와 권리를 찾고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죽는 날까지 노동자로 살아갈 것을 재결단하였다. 그 후 동지는 동양튜브, 선창산업 등에서도 변함없이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중 87년 8월1일부터 3일까지 매포수양관에서 열린 인천기노련 주최 ‘인천지역노동자 여름수련회’에서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거의 의식을 잃은 동지를 구출하고 다시 또 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운명하게 되었다. 동지의 삶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고 불의에는 한치의 용서와 타협없는 투사였다.
no6
이 문 철 (당시 34세)
1954년 충남 당진 출생
1969년 충남 당진중학교 졸업
1970년 인천 신진자동차 공업사에 정비공으로 입사
1986년 대원여객 입사
1988년 10월 부당하게 해고당함
1988년 11월 1일 부당해고와 연장근로 수당 미지급에 항의투쟁 중 분신
1988년 11월 6일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88년 6월 27일 대원여객의 노동자들이 연장근로수당 지급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하자, 회사측은 승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동지를 부당 해고시켰다. 이에 동지는 부당 해고에 항의하며 삭발을 결의하고 연장근로수당 지급과 사장면담을 요구하던 중, 부당한 해고조치에 격분하여 신나를 온몸에 붓고 분신을 감행하였다. 병원에서도 “업주들이 기사들을 속여먹고 노예취급을 한다. 돈 몇푼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 노동자를 하인이나 종취급하는 사용자들의 정신상태를 뜯어 고쳐야 한다. 주종관계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부인과 세명의 자식들을 남기고 산화하여 갔다.
no6
이 상 남 (당시 30세)
1959년 전남 신안군 비금면 출생
1984년 10월 1일 현대 엔진 공업에 입사
상기철구 공장 기능직 사원으로 근무
1987년 9월 12일 현대중공업 구사대 차량에 깔려 중상
1989년 5월 16일 물리치료 직후 화장실에서 실신,
심장마비로 612일간의 사투끝에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87년 9월 12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임원 개선 명령 움직임에 대하여 그룹노동조합협의회의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현대 중공업 민주노동조합 총무부장 김형권씨가 노동자들에게 발표한 성명서를 복사하기 위해 엔진 노동조합 사무실에 왔다. 이때 정체 불명의 괴한 30여명이 현대 중공업 경비대장 조남길을 선두로 엔진 노동조합사무실에 무력으로 집단 난입하여 김형권씨를 무차별 폭행하며 봉고차에 밀어 넣었다. 이에 노동조합 사무실에 있던 임원들이 봉고차를 막고 저지시켰고 휴식시간을 갖고 있던 이상남 동지를 비롯한 다수의 노동자들이 이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봉고차는 그냥 전진했으며 이 와중에 동지는 차 앞바퀴에 머리와 대퇴부가 끼어 5m를 질질 끌려가 중상을 입었다. 이후 동지는 1년 8개월의 긴 투병기간 중 끝내 숨지게 되었다.
no6
이 상 모 (당시 20세)
1969년 전남 보성 출생
1985년 광주 동신중학교 졸업
1986년 광주 직업훈련원 수료, 대우조선 입사
1989년 5월 29일 대우조선 제3기숙사 7동 옥상에서 분신, 투신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대우조선은 노동자들간의 분열을 조장하고자 ‘상록회’라는 구사대를 조직하였다. 5차교섭까지 시도하였으나 회사는 ‘임금동결 아니면 폐업하겠다’며 종래의 입장에서 한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29일, 박진석 동지는 반장이 나눠준 구사대 조직 ‘상록회’ 가입 신청서를 찢어 버리고, “더이상 노동자와 노동자간의 싸움을 유발시키지 말라”, “회사는 더 이상 노동자를 분열시키지 말라… 회사에서는 임금동결을 하려고 온갖 음모를 꾸미는 데 임금동결을 하면 어떤가를 보여주겠다..”며 분신하였고, 투병 중에도 “사용자는 각성해라 나는 죽지 않는다. 승리의 그날까지..”를 외치며 물러섬이 없었지만 89년 6월 결국 운명하였다. 이러한 박진석 동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분노하던 이상모 동지 또한 이날 밤 10시 40분경 기숙사 옥상에서 분신투신하였다.
no6
이 석 구
1980년 (주) 조흥택시 입사
1985년 노동조합 결성하였으나 와해됨
1987년 8월 31일 노동조합 재결성, 위원장에 선출
1987년 9월 2일 오후 8시경 노동조합 탄압중지 요구에 대해
회사측이 성의있는 답변이 없자 이에 격분하여 신나를 끼얹고 분신
1987년 9월 19일 강남 시립병원에서 치료 도중 운명
동지는 85년에 조합을 결성하였으나 회사측의 방해로 와해되자 이에 굴하지 않고 89년 35명의 기사들과 함께 민주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하여 조합장으로 선출되어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구사대를 통한 노동조합탄압에 맞서 사장에게 면담을 요구하였으나, 이런 요구가 묵살되자, 택시 위에 올라가 “노동조합탄압 중지하라”고 외친 후 분신하였다. 결국 3도의 중화상을 입고 강남시립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동지는 19일 새벽 부인과 5살과 10개월 된 어린 두딸을 남겨두고 운명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너희들끼리 일어난 일이다. 도의적인 책임만 지겠다”고 발뺌을 하였고, 이에 분노한 유가족과 조합측은 고인의 뜻이 관철될 때까지 무기한 장례를 연기하다 10월 1일에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no6
이 석 규 (당시 21세)
1966년 11월 30일 전북 남원 출생
1982년 용북중학교 졸업
1983년 광주 직업훈련원 수료
1984년 (주)대우 조선 입사, 선각소조립부 근무
1987년 8월 22일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들과 시위를 벌이던 중 오후 2시 40분경 폭력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대우병원으로 옮겼으나 오후 3시 30분경에 운명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물결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투쟁은 대우조선에도 휘몰아치고 있었다. 8월 22일 대우조선 회사측과 협상이 결렬되자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동지는 전경들의 무차별 진압으로 직격탄을 가슴에 맞고 오후 3시 30분경 병원으로 향하던 중 운명했다. 그러나 장지인 망월동으로 향하던 중 사측에 의해 남원의 선산으로 장지가 변경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살인경찰 구속과 피해보상, 휴업조치 철회의 조건이 수락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했으나 정권과 언론매체들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동쟁의 방법이라고 비난하면서 노동자들을 연행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며 시신을 탈취하여, 남원의 선산에 안장, 죽어서까지 편안히 눈감지 못하고 적들의 더러운 손에 또다시 죽임을 당하였다
no6
이 순 덕 (당시 32세)
1956년 충남 예산 출생
1979년 한양대학교 체육과 졸업
1984년 홍성 YMCA중등교사협의회 회원 활동
1986년 3월 서천군 서면 중학교로 좌천 발령
6월 28일 충청지역교육민주화 실천결의대회 참가
1986년 8월 파면
1987년 1월 3일 운명
전교조가 채 밝아오지 않은 87년 1월 3일, 이순덕 동지는 학교 계단에서 쓰러져 5개월의 투병생활 끝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충남에 살면서 서울 명동까지 가서 파마를 한다하였고, 학생이 자습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망신을 주던 이순덕 동지는 84년 5월 예산여고에서 박경이씨를 만나면서 참교육에 발을 들여놓고 불꽃처럼 치열한 삶을 살았다. 대전 체육고 재직 시에는 당시 민중교육 관련으로 해직된 교사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고 좌천 발령된 서천의 서면 중학교에서도 학생 및 동료들과 온몸으로 함께 하였고, ‘깨달은 것은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곧은 성품으로 충청지역의 교육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가 끝내는 파면됐다. 양심선언문을 직접 만들어 뿌리던 이순덕 동지는 참교육의 ‘당찬 새벽’이었다.
no6
이 영 일 (당시 28세)
1962년 강원도 홍천군 출생
1981년 속초고등학교 졸업
1984년 방위병 입대
1988년 9월 자동차 정비 기능사 2급 자격증 취득
1989년 4월 (주)통일 입사
1990년 5월 3일 오전 8시경 회사측과 경찰의 지속적인 탄압에
분노, 항의하며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투신
평소 내성적이었던 이영일 동지는 89년 11월 조사통계부 차장과 90년 2월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면서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강한 애착을 갖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주)통일 측과 경찰은 노동조합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을 해왔는데 노모에게 노동운동을 그만 하게 하라는 협박을 통해 고통을 주었다. 90년 5월 3일 동지는 식당 옥상에서 악랄한 노동조합 탄압에 분노, 항의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내용과 어머님에 대한 따뜻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용과 통일이 되면 아버님 고향에 가보고 싶었는데, 어머님 뼈라도 고향에 묻어 드리고 싶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이후 이날 10시 50분경 창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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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호 (당시 25세)
1964년 5월 전북 부안 출생중학교 졸업 후
가정을 돕기 위해 서울로 상경, 노동자 생활을 시작
1988년 1월 인천 협신사 입사
1989년 10월 29일 노조재건 활동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
89년 10월 29일, 이재호 동지는 인천주안 4동에서 노동조합 관련 상담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둔기에 턱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동지는 그 동안 89년 2월 노동조합 결성 이후 계속되어온 무자비한 노동조합 탄압 속에서 파괴된 노동조합을 재건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해오다 끊임없는 노동조합 탄압의 협박속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경찰은 이를 단순 폭행치사 사건으로 넘기려 했으나, 이는 공안정국 아래서 자행되어온 정부기관의 불법적 연행과 테러, 구속, 수배, 미행 등과 긴밀히 연관되는 것으로 인권유린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우리 사회의 무법 천지성을 반증하는 사건이라 할 것이다.
no6
이 종 대
1988년 9월 기아산업 노동조합 대의원 당선
1989년 1월 임시 대의원 대회에서 해고노동자 복직운동을 벌임
1989년 3월 25일 복직·임금인상 쟁취을 위해 투쟁, 노조 민주화를 위해 헌신
1989년 7월 3일 오전 11시 40분 노조 사무실에서 부당해고에 항의하여 분신
1989년 7월 8일 운명
89년 들어와 기아측의 폭압적 탄압이 계속되었고, 노동조합 위원장에 출마했던 배재정 씨를 이력서 누락기재 이유로 해고통보를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조합 위원장 유호영은 조합원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임금 협상 타결을 했으며, 이종대 동지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7월 3일 해고통보를 하였다. 이에 동지는 해고의 부당성에 항의하며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나의 희생을 끝으로 더이상 부당해고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라는 피맺힌 절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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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 희 (당시 27세)
1991년 6월 8일 인천 삼미기공에서 임금인상 보고대회 도중 분신
1991년 6월15일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주) 삼미기공은 1991년 4월 11일부터 임금교섭을 시작했으나, 노동조합 위원장이 회사측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일방적으로 타결짓고 보고하였다. 이에 분노한 노동조합 간부로서 집행부의 어용성에 분노하고 있던 홍보부장 이진희 동지는 임금인상 보고대회 도중 분신하여 90% 이상의 화상을 입고 분신, 8일만인 15일에 운명하였다. 이와 함께 조합원의 분노를 산 것은 회사측의 태도이다. 회사측은 병원에 찾아 와 가족들에게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며 “회사에 분신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조용히 수습하자”고 회유하면서 동지의 뜻을 왜곡하기에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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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종 호 (당시 30세)
1964년 경남 합천군 출생
1982년 동양기계 입사 (현 통일)
1983년 창원 기계공업고등학교 졸업
1987년∼88년 정당방위대 활동
1988년 노동조합 15년차 대의원 역임
1989년 금성사 창원대로 가두투쟁으로 1차구속
1991년 1년 6개월의 실형만기로 석방 노동조합 18년차 대의원 역임
1992년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해 굴뚝농성을 벌이다 2차 구속,
쟁의조정법과 업무방해로 실형 10월, 재판 도중 법정모독죄로 3년 실형 선고
1994년 9월 18일 진주교도소에서 운명
임종호 동지는 89년 6월 금성사 창원대로 투쟁에 참가하였다가 수배, 구속되었고 92년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한 굴뚝 투쟁을 벌이다 또다시 구속되었다. 2차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 도중 수갑을 풀어주지 않는 것에 항의, 풀어진 수갑을 재판관에게 던져 법정모독죄로 3년의 실형을 추가선고받고 청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동지는 계속되는 고난의 실형 속에서도 조합원들과 동지들에 대한 꿋꿋한 사랑을 잃지 않고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독방 수형생활로 인한 정신질환 문제로 94년 8월 진주 교도소로 이감되었고 그 해 9월18일 독방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동지들 곁으로 돌아왔다. 교도소에서는 자살로 판명했으나 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no6
임 혜 란 (당시 28세)
1965년 4월 17일 서울 출생
1984년 숭의 여자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가정교육학과 입학, 기독학생회 동아리 활동 시작
1988년 운동 위해 중퇴, 인천 링크시스템 입사
1989년 대한 트랜스(주) 입사, 노동조합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
1990년 노동쟁의와 관련하여 해고당함
업무방해 혐의로 6개월간 옥고를 치름
1991년 인천노동 선교문화원 창립에 참여
문화원 내 땀방울 산악회 간사로 활동
1992년 9월 17일 백혈병으로 입원, 투병활동
1993년 9월 9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no6
임 희 진 (당시 32세)
1960년 서울 출생
1980년 세종대학교 국문과 입학
1985년 광진중학교에 부임
1989년 신암중 부임, 전교조 분회결성 주도, 해임
1990년 강남강동 지회 교육선전부 활동
1992년 해직 3년만에 암으로 운명
임희진 동지는 89년 서울 신암 중학교에서 전교조 신암중학교 분회결성으로 해직되었다. 동지의 부모에게까지 압력을 가하며 전교조 탄압을 하는 비열한 정권에 맞서 해직 후 교육선전부 활동을 했다. 91년에 동지는 암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동지들과 조직을 걱정해 발병 사실을 숨기며 참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임희진 동지는 무서운 병마와 끝내 혼자 싸우다가 92년 “전교조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른 두 해의 생을 마감했다.
no6
장 용 훈 (당시 29세)
1959년 전남 승주군 월등면 출생
1987년 전남 순천시 현대교통 택시운수회사에 입사
1988년 5월 24일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와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여 분신
1988년 5월 30일 전남대 병원에서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현대교통 택시기사로 근무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 대변하는데 앞장서오던 장용훈 동지는 88년 2월28일 자전거와 경미한 접촉사고가 발생하여 자비로 합의, 해결하였다. 이 일을 빌미로 3월 5일 회사의 과장은 동지에게 불리한 경위서를 강요했고, 동지가 이를 거부하자 일방적으로 승무 정지시키고 집단폭행하였다. 이에 동지는 원통한 마음으로 검찰과 노동부에 고소와 탄원을 했으나 이들은 합의만을 종용한 채 방관했다. 결국 회사측은 고소에 대한 보복으로 노사협의회도 거치지 않고 부당해고를 통지했다. 동지는 억울한 상황을 해결해 보고자 여수 노동부를 비롯해 서울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절차만을 따지면서 무성의로 일관할 뿐이었다. 결국 88년 5월24일 장용훈 동지는 회사 사무실에서 몸에 신나를 끼얹고 “뒤를 잘 부탁한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가정은 파괴당하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이놈의 세상 비통해서 살 수 없다”라고 외친 후 산화해 갔다
no6
전 태 일 (당시 22세)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 출생
1964년 서울 상경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 한미사 재단보조, 재단사로 일함
1969년 6월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 조직
1970년 9월 바보회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 회장에 선출됨
10월 7일 평화시장 기사특보가 경향신문에 남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항의 요구를 제출함
10월 24일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분신, 밤 10시경 성모병원에서 운명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한 노동자가 죽어갔다. 스스로 자기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당긴 스물 두살의 젊은이는 불타는 몸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며 쓰러져서까지 절규하던 노동자 전태일 동지였다.
청계천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현실에 위협받는 비참한 모습을 보며 착취와 혹사에 분노, 잔인한 노동조건을 자신의 힘으로 개선하려는 강한 의지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노동현실을 고발하였던 동지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근로기준법과 함께 산화하여 갔다. 동지의 죽음은 열악한 노동자들에게는 자각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노동운동을 발전시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no6
정 경 식 (당시 29세)
1959년 12월 15일 경남 의창군 진동 출생
삼진중학교 졸업, 한독직업훈련원에 다니다 가정사정으로 중퇴
19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
1987년 5월 26일 노동조합지부장 선거운동에 참여
1987년 6월 8일 실종
19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유골로 발견됨
동지는 3년동안의 월급으로 800만원이나 되는 돈을 저축할 정도로 검소하고, 생활력이 강했으며 동료 노동자들과의 관계도 대단히 원만하였다. 동지는 노동자로서의 의식도 투철했는데 86년 5월에 공장에서 일을 하다 팔을 다쳐 4개월 정도 입원해 있었을 때, 문병온 동료들에게 “근로자들을 위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특히 젊은 층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퇴원한 이후부터는 노동조합를 민주화 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87년 5월 노동조합지부장 선거에 참여하면서 민주 노동조합을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조합 건설을 반대하는 후보들과 다툼이 있은 후 실종되었다가 88년 3월 창원 불모산에서 유골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동지의 죽음을 비관자살로 마무리지었으나,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현실의 벽을 허물려고 봇물처럼 터져나온 노동조합 민주화의 물길을 막기 위해 노동자의 죽음을 은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no6
정 영 부 (당시 49세)
1945년 5월 18일 마산 출생 동아대학교 졸업
경남공업고등학교, 진주 대동기계공업고등학교 근무,
경남 수필문학회 부회장 역임
1989년 진주 대동기계공업고등학교 해직, 전교조 초대 진주지회장,
서부경남국민연합준비위원장 역임, 진주신문 창간논설위원
1990년 제1회 전교조 참교사상 수상
1993년 5월 13일 지병으로 운명
정영부 동지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부산 경남공업고등학교를 거쳐 진주직업훈련원에 잠시 근무하다가 진주대동기계공업고등학교에 10년 남짓 근무하고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당할 때까지 기술 인력양성에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선생님은 경남 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경남수필문학회 상임이사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수필집 [슬픔이 피어나는 언어의 배경]을 내 놓은 바 있다. 87년 교사협의회부터 교육운동을 시작해 89년 전교조 진주지회 초대지회장, 서부경남연합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부도덕한 권력의 탄압에 온몸으로 맞서던 중 건강을 잃게 되었다. 이런 중에도 정영부 선생은 건전한 지역신문의 필요를 느껴 [진주신문]의 창간준비위원, 편집위원, 논설위원으로 일하였고 운명할 때까지 감사로 계셨다. 동지는 1990년 전교조에서 주는 [참교사상]을 수상하였다. 정영부 선생은 1993년 5월 13일 진주시 칠암동 경상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운명하였다.
no6
정 영 상 (당시 37세)
1956년 2월 12일 경북 영일 출생
1972년-1976년 영일중학교, 포항고등학교 졸업
1983년 광주사범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안동중학교 부임
1987년 안동교사협의회 부회장 역임
1989년 8월 안동 복수여자중학교에서 해임
전교조 안동지회 부지회장
1990년 이후 단양지회로 전출하여 활동
1993년 4월 14일 운명
공주사대를 졸업하고 안동중학교로 부임한 정영상 동지는 86년 경북 안동시 복수여중으로 전보 발령,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87년 전교련 안동교사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하게 된 동지는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으로 복수여중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전교조안동지회 부회장을 역임한 동지는 시집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93년 4월14일 단양중, 매포중, 단양국민학교 현장방문을 하고 단양지회 모임 후, 늦게 귀가하여 자던 중 1993년 4월 14일 새벽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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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운 갑 (당시 29세)
1964년 11월 26일 출생
1983년 2월 10일 진주상업고등학교 졸업
1988년 1월 25일 삼미특수강 입사
1990년 노동조합 4대 대의원 활동
1991년 8월 4대 집행부, 비상대책위원회 총무부장
1992년 암투병 중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사수를 위해 노력함
1993년 1월 25일 병상에서 운명
경남 사천 묘역에 안장
정운갑 동지는 노동조합 활동을 해오던 중 암선고를 받고도 자신보다 노동조합을 위해 헌신하다 지병으로 운명하였다. 88년 삼미특수강에 입사하여, 90년 4대 대의원으로 민주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열심히 활동했으며, 4대 집행부의 총무부장을 역임, 위원장의 직권조인으로 인하여 노동조합이 사측으로 탄압을 받을 때, 91년 비상대책위의 총무부장을 역임하며, 온몸으로 투쟁하여 노동조합을 사수하였다. 당시 이미 임파선 암이라는 선고를 받은 상태로 혼자서 병마와 힘겹게 싸우면서도 감옥에 간 동지들을 먼저 걱정했던 동지이다. 92년 임금동결 거부, 인원감축 반대 파업 투쟁시 암말기 진단을 받고도 자신의 몸을 돌볼 시간도 없이 투쟁하다 운명하였다.
no6
조 경 천 (당시 48세)
1945년 7월 29일 평양 출생
1963년 고등학교 중퇴 후 공장생활 시작
1981년 한양합판 입사
1988년 5월 한양합판 노동조합 설립에 중추적 역할 담당
1990년 노동조합 위원장선거에 출마
1991년 7월 1일 노동조합 회계감사로 일하던 중 해고
1992년 7월 인천지방법원에서 해고무효 판정으로 승소
1993년 4월 고법에서도 승소했으나 회사 측 복직 묵살
1993년 5월 19일 심장마비로 운명
인천 시립 공동묘지에 안장
조경천 동지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1988년 한양합판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주역으로 나서 1991년 해고될 때까지 회계감사로 한양합판 전체노동자의 권익향상을 위한 노동조합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활발한 조합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회사측은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전체 조합원에게 회계보고를 한 것을 핑계로 동지를 해고시켰다. 1993년 4월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지만 회사측은 법원의 판결과, ‘해고된 자는 1심 결과가 끝나면 그 결과에 의해 복직시킨다’라는 단체협약도 무시한 채 복직을 거부하였으며, 임금도 주지않고 오히려 사표를 강요하였다.
해고 전부터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해고 이후 더욱 건강을 해친 조경천 동지는 1992년 심근경색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동지는 1993년 고법에서의 복직판결로 현장에 다시 돌아갈 것을 기대하였으나 회사측에 의해 거부되자 5월 19일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no6
조 수 원 (당시 28세)
1967년 강원도 태백 출생
1986년 대우정밀공업에 병역특례로 입사
1991년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 해고
1993년 마포 민주당사에서 38일간의 단식투쟁
1995년 12월 15일 민주당 서울시 지부에서 목을 매 자결
양산 솥발산 공원 묘역에 안장
병역특례 해고 노동자 조수원 동지는 민주당 서울시 지부에서 3년동안 군문제 해결을 위한 농성을 전개하다 1995년 12월15일 목을 매 숨진 채로 젊은 생애를 마감했다. 동지는 86년 대우 정밀에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특례보충역으로 4년 6개월 가량을 마쳤으나 노동조합 활동 과정에서 해고를 당했다. 이후 병무청으로부터 현역병 입영영장을 발부받은 뒤 해고무효소송을 제기하며 입영연기를 요청했지만 이를 거부당하고 수배생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수원 동지를 비롯한 병역특례 해고자 10명은 마포 민주당사에서 목숨을 건 38일간의 단식 농성을 했지만 병무청은 법논리를 내세워 노동자를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았다. 조수원 동지의 죽음은 현정부의 잘못된 병무행정과 병무청의 부당하고 비정한 병무행정이 빚어 낸 간접 살인에 다름아니다.
no6
조 정 식 (당시 25세)
1964년 1월 17일 대구시 수성구 출생
1982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입학, 학생운동 투신
1984년 7월 제적, 인천 범아산업에 취직
1986년 5월 인천 진도에 입사하여 노동운동 시작함
1987년 11월 반제동맹사건으로 구속, 3년형을 선고
1989년 5월 10일 성수동 영전기계에 취업
1989년 5월 24일 오후 3시경 공장에서 산재로 운명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조정식 동지는 대학에서 제적된 후 인천 범아산업을 거쳐 인천 진도에 입사하여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동지는 진도에서 친목회를 만들어 노동자들의 현실에 관해 토론활동을 했으며 투쟁을 호소하며 혈서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87년 반제동맹사건으로 치안본부 인천 대공분실에 불법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0.7평의 차디찬 독방에 수감되었다. 88년 석방 후 89년에 영전기계에 선반공으로 취업한 동지는 힘들지만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더없이 좋아했다. 그러나 5월 24일 드릴링 작업 중인 조정식 동지 뒤에서 선반공이 시간에 쫓겨 선반의 속도를 높이는 순간 공작물 균형을 위해 고정시켜 두었던 추(약 30㎏)가 튕겨나와 동지의 뒷머리를 강타,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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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희 돈 (당시 30세)
1963년 2월 19일 충북 진천 출생
1989년∼90년 인천 남일금속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
1991년∼92년 노동조합 교육부장으로 활동
1992년 12월∼93년 2월 20일 남일금속 회사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으로 활동
1993년 2월 20일 새벽 6시경 과로가 겹쳐 뇌경색증으로 운명
채희돈 동지는 부도라는 절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회사 정상화와 고용안정 확보를 위해 기꺼이 비대위 위원으로 나서는 헌신성을 발휘했다. 비록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채희돈 동지는 그 누구보다도 정열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규칙적인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낮에는 비대위 활동은 물론 실의와 절망에 빠진 주위 동료들을 격려하고, 밤에는 주변 동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엄습해 오는 겨울 추위와 싸우며 현장규찰임무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던 중 2월 20일 힘겨운 주간 활동을 마치고 야간 비대위 회의 도중 머리의 통증을 호소하면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졌다. 이것이 동지의 마지막 모습이 되어버렸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진 동지는 하루를 넘기지 못한 채 한많은 노동자의 설움을 딛고 일어서고자 했던 찬란한 노동해방의 꿈을 살아있는 동료들의 과제로 남긴 채 운명하였다.
no6
최 대 림 (당시 42세)
1957년 12월 10일 경남 고성 출생
1975년 고성종합고등학교 졸업
1979년 군대 제대
1985년 1월 23일 대우조선 입사
1998년 2월 13일 정리해고, 근로자 파견법 입법화에 반대하면서
건조중이던 배위에서 분신·투신, 운명.
양산 솥발산공원 묘역에 안장
최대림 동지는 1998년 2월 13일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의 입법화가 합의되어 국회통과를 앞두고 대우조선에서 건조 중이던 유조선 갑판위 25M위에서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당시 대우조선은 IMF 경제체제를 이용해 97년말 성과금과 상여금을 뒤늦게 지불하고, 년차수당 체불과 토요격주 휴무중단 등의 의도를 노골화하면서 조기작업과 한시간 일 더하기 등을 강요하고 현장 조합원들을 과거와 같은 방식의 노동통제와 부당노동행위로 탄압해 왔다. 그리고 동지가 지게차 운전 도중 안전사고를 냈다하여 약 2개월 전에 보직을 박탈하였으며, 타 부서로 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해 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동지는 재벌자본과 정권의 음모에 맞서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이 하나로 단결하여 정리해고, 근로자 파견법을 저지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운명하였다. 그리고 회사의 탄압에 짓눌려 노동조합의 행동지침을 따르지 못하는 조합원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no6
최 동 (당시 30세)
1960년 8월 14일 서울 출생
1980년 3월 성균관대학교 입학
1984년 10월 부천에서 노동운동에 투신
1989년 9월 4일 ‘인천지역노동자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구속, 집행유예로 출소
1990년 8월 7일 오전 9시 30분경 한양대학교 사회과학대에서 분신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동지는 89년 인천지역노동자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안기부에 의해 밀실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자신을 자해하는 등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벌이면서 수감 중 구치소 의무과에서 지급한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이후 발작과 실어증세가 나타났다. 집행유예로 출소되었으나 구치소 수감 중 얻은 병으로 극도의 심리적 불안상태가 계속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후 종로 신경정신과에 입원, 퇴원하였으나 2개월 뒤에 한양대에서 “미제와 적들의 탄압을 고발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여 오후 10시에 운명하였다.
no6
최 명 아 (당시 35세)
1963년 11월 10일 충북 음성 출생
1985년 2월 이화여대 행정학과 졸업
1985년 인천 태성전자, 인우전기, 한미실업 등에 입사
1986년 인천 그로리아가구 입사
1989년 그로리아 가구 노동조합 교육선전부장 활동,
화재로 인한 인원감축 때 집단해고 됨
1989년∼1995년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교육부장,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
1995년 12월 민주노총 조직국 조직1부장으로 활동
1998년 2월 11일 진료차 서울대 병원에 갔다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짐
2월 24일 오후 1시경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최명아 동지는 민주노총 조직부장으로서 남다른 책임감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해오며 항상 격무에 시달렸다. 특히 1998년 IMF 상황 속에서 민주노총이 재벌개혁과 고용안정을 위해 긴박한 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부족한 인원으로 더욱 바쁘고 힘들게 활동해왔다. 2월 4일에는 부당노동행위 사업장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동조합대표들과 국민회의 당사에 농성을 시작하면서 피로가 극심하게 누적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두통과 가벼운 얼굴마비, 그리고 시력장애가 나타났으나, 그 뒤에도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2월 10일, 11일에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점검하기 위해 쉴틈도 없이 근무해왔다. 그러다가 11일 오후에는 두통과 눈 증세가 악화되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되자 안과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13일여간 뇌사상태에 빠져 인공호흡기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던 동지는 결국 2월 24일 오후 1시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no6
최 성 근 (당시 38세)
1955년 경남 마산 출생
1986년 부산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1986년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1988년 부산 평교사협의회 참가로 참교육운동 시작
1990년 전교조 부산지부 사립지회 동래 지구장
1991년 대동고등학교 전출
1991년 전교조 대의원, 사립지회 서구지구 대의원
1992년 12월 13일 간암으로 운명
최성근 동지는 남달리 학생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던 교육자였다. 교육운동가로서 동지의 활동은 87년 6월 민주화투쟁에서 역동적인 민중의 힘을 직접 체험한 뒤 91년 전교조 대의원으로까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89년 이른바 ‘교육대학살의 해’에는 전교조 탈퇴각서의 파문을 딛고 많은 해직교사의 참교육의 염원을 가슴에 품은 채 계성여상에서 인사위 투쟁, 예결산 요구투쟁, 서명 투쟁을 통해 열정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91년 동지는 평소 동지의 활동을 달가워 하지 않던 학교재단의 부당한 인사행정으로 인해 대동고등학교로 전출해야 했다. 대동고에서 동지는 학교와 지회활동에 보다 정열적으로 힘을 쏟으며 학생안전공제회, 보충수업비, 5월 서명투쟁을 주도하고 서부지부에서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 쉼 없던 교육민주화의 삶에 병마(간암)가 찾아왔고 많은 동지들의 안타까움을 뒤로 한채 92년 12월 13일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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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성 묵 (당시 49세)
1945년 11월 14일 안성에서 출생
1969년 양성중학교 입학, 평화버스에 입사
1985년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농성 참가
1986년 평택 시외버스인 서울여객입사, 노동조합대의원으로 활동
1990년 성호여객입사, 노동조합대의원, 노사의원, 상집위원 활동
1994년 3월 11일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와
조합원 탄압에 항거하며 분신, 운명
서울여객, 성호여객 등에서 최성묵 동지는 노동조합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동료기사들의 억울한 상황과 회사측의 부당행위를 시정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던 1994년 성호여객 노동조합위원장 선거 중 회사는 선거당시 선거 대책본부에서 활동하던 11명을 면직하거나 사표를 강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부당해고와 근로조건에 항의하러 간 최성묵 동지는 회사 전무와 동반분신,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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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성 조
1989년 7월 13일 남성 홍진 노동자로
‘무노동무임금 분쇄 결의대회’ 참가로 불구속
1989년 8월 2일 구사대 폭력으로 구타당하여 실신, 2차례 뇌수술
1989년 8월 5일 오후 10시 40분 운명
100여일간의 투쟁을 전개하던 남성 흥진은 회사측이 협상을 회피하면서 정상운행을 하지 않으면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구사대를 동원하여 공공연히 배차를 하고 시비를 걸어와 톱과 칼을 들고 위협하였다. 이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5월 2일 총파업이 시작되자 회사측은 구사대를 구성하여 조합사무실을 난입, 폭력으로 점거하여 노동조합간부들에게 시비를 걸며 소등을 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동지는 회사 건물 전등을 켜라고 항의했으나 구사대는 각목과 쇠파이프로 동지를 무차별 폭행하여, 2차례의 뇌수술을 받았으나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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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완 용 (당시 25세)
1964년 11월 2일 충남 천원 출생
1983년 인천에서 공장생활
1987년 산업재활원 방문, 환자들을 위로하면서
고통당하고 있는 재해자들과 삶을 같이함
1989년 계양구 박촌동 소재 흥업사에서
손가락 4개가 잘리는 산업재해를 당함
1989년 4월 9일 부평 철마산에서 산재없는 세상을 열망하며 분신
최완용 동지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세의 어린 나이에 정든 부모님 곁을 떠나 저임금과 12시간의 장시간 노동속에서 일을 하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일이면 산업재활원을 방문하여 고통당하는 환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회사에서는 남달리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러던 중 1989년 3월 1일,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출근하여 안전장치도 없는 프레스에서 작업하다 오른손이 잘렸다. 동지는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병원 산업재활원에서 재활 기술을 배우기를 희망하였으나 회사와 병원의 거부로 그것마저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내가 죽으면 중앙병원 영안실에 안치해 달라’며, 산재 노동자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온몸에 불을 붙여 산화해 갔다. 동지는 산재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영리에만 치우쳐 노동자의 생명과 생존권을 말살하는 자본가를 신랄히 비판하면서 숨진 것이다.
no6
최 웅 (당시 29세)
1964년 5월 1일 강원도 강릉 출생
1983년 강릉고등학교 졸업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입학. 동아리 ‘탈’ 연구회 가입 활동
1986년 노동운동을 위해 인천으로 이전
1987년 경동산업 입사
풍물패 활동 및 디딤돌 소모임 활동
1989년 경동산업 해고
인해협에서 간사로 활동
1990년 인천민중교육연구소 실무간사로 근무
1992년 인천민중연합 노동자위원회 활동
1993년 인천민중연합 부설 ‘우리’ 노동상담실 노사부장으로 근무
1993년 10월 26일 신혼여행 중 사고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최웅 동지는 87년 경동산업에 입사하여, 풍물패 활동과 민주파 모임인 디딤돌의 열성적인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89년 봄, 동지의 활동을 주목하기 시작한 회사측에 의해 해고되었고, 이후 90년초까지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실무자로 근무하며 복직투쟁을 전개하였다. 90년초 인천민중교육연구소와 92년 인천민중연합 상담실 실무자로 근무하였으며 전두환 정권 때부터 계속해온 병역징집 거부투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조합 방문조차도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동지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2년여 가까이 새벽에 아파트 자동차 세차를 해오고 있었으며 일주일에 3번 정도 중학생 과외지도를 하는 등 참으로 억척스러운 생활을 꾸려나갔다. 처가의 완강한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며 노동자의 삶을 결의하던 10월 26일,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불의의 조난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no6
최 윤 범 (당시 28세)
1960년 서울 출생
1976년 9월 서울 장충중학교 졸업.
잉글랜드사, 에펠사, 시엔나사에서 근무
1988년 2월 26일 고려 피혁 노조위원장 선출
1988년 4월 24일 해고 징계에 맞서 작업거부 철야농성
1988년 4월 25일 관리자들과 몸싸움 중 분신
1988년 4월 30일 한강성심병원에서 1시경 운명
용인 가톨릭 묘지에 안장
고려피혁 성남공장은 200여 노동자가 슈발리에 구두를 생산하는 대우계열 중소기업으로,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더이상 노동자가 자본가의 노예일 수 없다고 생각한 최윤범동지를 중심으로 민주노동조합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본조의 공작에 의해 성남공장은 지부가 되었고, 지부장 선거과정에서 회사측과 어용노동조합 측에 의해 민주노동조합측이 패배하자 회사는 민주노동조합에 대해 탄압을 시작했다. 부서이동과 해고가 자행되고, 이에 반대하며 농성에 돌입하자 회사측과 어용노동조합 측은 민주노동조합 측을 회사 밖으로 밀어냈고 민주노동조합측은 회사밖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농성 3일째, 노동부가 중재를 한다며 회사측과 협상에 들어갔으나 회사측은 그사이 물품을 빼돌리려 했고, 이에 항의하며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동지는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 산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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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태 욱
1990년 5월 9일 해고
1990년 5월 14일 원직 복직
1990년 5월 30일 재차 해고
1990년 7월 8일 청도 천주교 성당에서 분신
1990년 7월 14일 투병 중 운명
90년 5월 30일 노동조합 위원장과 함께 조합원 14명을 회사측은 노동자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야간 근무조를 조합원으로만 편성하여 근무를 지시하였으며, 위원장을 비롯한 조합원들이 이를 부당노동행위로 간주, 퇴근해 버리자 징계위원회에 최태욱 동지를 회부하여 해고하였다. 이러한 회사측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던 동지는 90년 7월 8일 오후 6시경, 청도 천주교 성당에서 신나를 끼얹고 분신을 기도, 신음 중인 것을 신부가 발견하여 곧 병원으로 후송하였으나 운명하였다. 91년 5월10일 조국의 참된 자주촵민주촵통일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노태우 정권의 사냥감이 되고 만다는 유서를 남기고 윤용하 동지는 분신했다. 분신 이틀 후인 12일 동지는 “노동해방을 위해 분신을 생각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운명하였다.
no6
표 정 두 (당시 24세)
1963년 4월 1일 전남 신안군 암태도 출생
1979년 대동고등학교 입학하여
1980년 독서회활동 하다 5·18 당시 정학당함
1983년 호남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군복무 중 미군에 대한 저항의식 지님.
1986년 복학했으나 비민주적 학사운용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자퇴
1986년 5월 야학교사로 활동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활동
1987년 2월 ㈜신흥금속에 입사
3월 6일 서울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분신
3월 8일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87년 3월 6일 표정두 동지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 하적장 부근에서 몸에 불을 붙힌 후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는 구호를 외치며 주한미대사관 앞으로 30미터 가량 달리다 쓰러졌다. 이후 응급실에서 뚜렷한 의식으로 “나는 호남대학을 다니다 돈이 없어 그만두고 신흥금속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다. 연락처와 유서는 인근 다방에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분신 당시 동지의 가방 속에는 “내각제 반대”, “장기집권반대”라는 쪽지와 슐츠의 방한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신문뭉치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고인의 유해를 폭력으로 유가족과 민주인사들을 분리시키면서 화장하여 금강에 뿌렸다.
no6
홍 기 일 (당시 25세)
1960년 전남 화순 출생 , 전남 중학교 중퇴
1984년 2월 사우디에서 미장공으로 취업
1985년 2월 귀국하여 건설사업장 전전하며 생활
1985년 8월 15일 오후1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전단을 뿌리고
군부독재에 항거하며 분신,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총상을 입기도 했고, 그후 건축노동자로 일하면서 살아남은 부끄러움을 승화시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여 살아왔던 동지는 광복 40주년을 맞이하던 1985년 8월 15일,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장소인 도청 앞에서 동지는 몸에 불을 붙인 후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 그토록 울부짖으며 부르짖던 민주가 자유가 뜨거움의 이름으로 5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 현실에 무등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침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착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광주 시민이여 침묵에서 깨어나라 민주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 뭉칩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다. 동지는 임종을 지켜보는 부친에게 “절대 비굴해지지 마세요, 경찰과 타협해서는 안되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산화하였다.
no6
홍 장 길 (당시 58세)
1939년 7월 8일 경남 밀양군 출생
밀양수산 동명중학교 졸업
1973년 연희교통 (현재 국민캡) 입사
1992년 노동조합 상임위원 재임
1994년 노동조합 고문으로 선임 활동
1997년 5월 31일 국민캡 휴게실에서 음독자결. 운명
홍장길 동지는 밀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의 굴레를 벗고자 박정희 정권의 인력 수출정책인 파월장병으로 월남전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것만으로는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남들이 천하게 여기는 택시 노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택시 사업주들은 이윤창출을 위해 현대판 노예제도를 도입하여 무사고 10년에 개인택시 영업권이라는 제도의 올가미를 씌워 족쇄를 채웠고 국민캡 사장 허준도는 그것도 모자라 회사를 분할매각하고 기사를 택시의 부품처럼 끼워팔아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하지만 홍장길 동지는 분할매각 완전철회를 외치며 24년 8개월이라는 한많은 국민캡 노동자생활과 60년 인생을 택시 자본가에게 죽음으로서 저항한 것이다.
no6
황보영국 (당시 26세)
1961년 9월 16일 부산 출생
1979년 성지공고 중퇴, 울산 현대중공업, 부산 삼화고무, 태화고무 근무
1987년 3월 3일 박종철 49재에 참석했다가 연행되어 1주일간 구류받음
1987년 5월 17일 부산상고 앞에서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를 외치며 분신
5월 25일 운명
황보영국 동지는 울산 현대중공업, 부산 삼화고무, 태화고무, 우성사 등에서 연강판전기용접, 중장비 운전 등의 기술을 익히면서 생활하던 성실한 노동자였다. 1987년 5월 17일, 광주항쟁 7주기를 맞이하여 거사를 결심한 동지는 부산상고 앞에서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후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를 외치며 100m를 달리다 쓰러졌다. 동지는 쓰러지면서도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절규하며 혼절, 그후 경찰에 의해 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하다 일주일만에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