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f-300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때 흘린 피 한 방울은
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는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그 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ㄱ-ㅂ
강상철 / 고정희 / 기종도 / 김기설 / 김길호 / 김남주 / 김말룡 / 김병곤 / 김병구 / 김상원 /

김선호 / 김순복 / 김영자 / 김영환 / 문영수 / 문익환 / 문한영 / 민병일 / 박상구 / 박성은 /

박순덕 / 박현채 /

ㅅ-ㅎ
성순희 / 손구용 / 신연숙 / 양용찬 / 오원진 / 오한섭 / 이덕인 / 이범영 / 이오순 / 이원기 /

이재식 / 이정순 / 이태춘 / 임기윤 / 장준하 / 정상순 / 정상율 / 정성규 / 정연관조영래 /

채광석 / 최성묵 / 최정환 / 최종길 / 함석헌 / 황인철 /

 

 

no1
강 상 철 (당시 22세)
1964년 3월 24일 전라남도 해남 출생
1986년 목포전문대학교 재학 중 미등록 제적
목포 사회운동 청년연합 사무차장 역임
목포 평강교회 청년회 총무
1986년 6월 6일 목포역 광장에서 민주화운동 탄압 중지와
5·18 규명, 직선제 개헌 단행을 촉구하는 선언을 외치며 분신
1986년 6월 26일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강상철 동지는 1964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해 1986년 목포역 광장에서 분신하였다.
동지는 80년 5월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의 비정함이 정국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으며 각 민주단체의 각성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삼민(민주, 민족, 민중)주의를 좌경, 용공으로 모는 전두환 및 5·18 쿠데타 주동자를 몰아내고 민주인사 사면복권 및 석방과 직선제 개헌단행을 촉구했으며, “정의로운 죽음은 의로운 죽음이요, 승리의 죽임이며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전 민중의 함성이며, 동참이며, 투쟁의 길이며, 승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라고 확신하며 장렬히 산화하였다.
no2
고 정 희 (당시 28세)
1960년 12월 4일 전남 광주 출생
1979년 3월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입학
1986년 1월 졸업후 IBM입사 (호주 파견근무)
1987년 3월 퇴사 후 연세대학교 정외과 편입학
1987년 10월∼12월 민족통일 애국 청년단
중앙본부 기획위원회에서 활동
1988년 1월 청와대, 미대사관, 각 언론기관에
부정선거에 관한 투서 및 미대사관에 투석 계획
1988년 3월 서초 경찰서 대공과에 연행 후 정신병원에 강제수용
1988년 5월 1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투신자살로 발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1988년 1월 이후 청와대, 미대사관, 백악관, 독일대사관 등에 ‘노태우 부정집권’을 고발하는 투서를 한 고정희 동지는 88년 3월 경찰에 연행되어 서초 경찰서 대공과에서 조사를 받다가 강남 성모병원 정신병동에 강제 입원된 뒤, 5월 13일 오후 5시 40분경에 병원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다. 병원측의 주장에 따르면 고씨는 사건 당일 10층 정신병동 정문을 통해 나와 비상계단을 이용해 9층으로 내려간 뒤 공사 중인 신축공사장 베니어판(구멍)을 뚫고 나가 투신, 2층 구름다리 위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정황과 증언들에 의하면 병실안에서 인권위원회, 대사관 등에 탄원서를 쓰는 등 처참하게 몸부림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no3
기 종 도 (당시 46세)
1938년 11월 13일 장성군 출생
1951년 삼계고등공민학교에서 수학
1968년 장성군 3선개헌 반대투쟁위 위원
1972년 민주회복 국민회의 위원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수습대책위
장래위원장 이후 수배(6월 부산에서 피검)
1982년 3월 24일 소위 횃불회 사건으로 구속.
잔혹한 고문으로 극도의 건강 악화상태에 빠짐
1982년 5월 31일 부인과 2남1녀를 남기고 오후 7시에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당시 기종도 동지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장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군사정권의 군화발에 무참히 짓밟혀진 이름없이 죽어간 영령들을 관에 염하고,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광주민중항쟁 가담자로 수배받게 되었다. 80년 5월 부산에서 검거되어 부산교도소, 청주교도소 등지에서 2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81년 8월 15일에 출감하게된다. 그 후 동지는 집안에서 요양하다가 횃불회 사건으로 조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 입원치료를 받았고, 같은 사건으로 다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동지는 투병 끝에 5월 31일 못 다 이룬 민주화를 가슴에 품은 채 운명하였다
no4
김 기 설 (당시 26세)
1965년 경기도 파주 출생
1983년 인천 수도전기통신고 중퇴
1984년 대입검정고시 합격
1988년 성남 민주화청년운동연합 가입
1989년 성남 노동자의 집에서 상담간사로 활동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본부 사회부장
1991년 5월 8일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폭력살인 만행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분신한 후 투신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동지는 1988년 9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강연을 듣고 즉석에서 성남민청련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성남민청련 노동분과 소속, 지역 노동운동 단체들을 지원 연대하는 사업에 열의를 갖고 참여하다 민청련이 해체되면서 성남노동자의 집에서 교육상담 간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동지는 노동자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조광피혁 등에 입사했으나 성남 민청련에서의 활동이 드러나 쫓겨나곤 하였다. 91년 1월부터 전민련에서 사회부장으로 일하게 되어 활동하면서 노태우정권의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폭압을 새삼 인식하였으며, 강경대 동지의 죽음 이후 범국민 대책회의에 참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던 중 분신을 결행하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여러 사람을 불법연행하여 강압수사를 벌여 유서대필이라는 상식이하의 조작으로 동지를 두 번 죽이는 파렴치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no3
김 길 호 (당시 34세)
1954년 1월 18일 전남 무안 출생
목포 중학교 졸업
부산, 서울 등에서 장사를 했으나 실패 1977년 귀향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에 참여 이후 기독교 농민회 회원으로 활동
1986년∼87년 7월 4일 마늘, 양파, 생산비 보장 및
전량수매 촉구대회 때 선봉에서 활약
1987년 12월 20일 부정선거 규탄 및 선거무효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무안경찰에 잡혀 집단구타 당함
1987년 12월 24일 구류 5일을 살고 풀려나옴, 통원치료
1988년 3월 15일∼25일 광주기독병원 입원
1988년 3월 25일 병세가 호전되지 않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끝내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김길호 동지는 80년 광주항쟁 이후 기독교 농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특히 86년 7월 4일부터 87년까지 무안에서 지속된 ‘농산물(마늘, 양파) 제값받기 투쟁’에서 선봉대로서 열심히 투쟁에 참가하였다. 87년 12월 20일. 무안에서의 대통령선거 무효투쟁시 오후 5시경 무안읍에서 광주 방면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이 논두렁에 동지를 처박고 집단구타하였다. 이후 경찰에 연행되어 5일간의 구류를 살았고, 구타로 인한 후유증으로 무안읍 유성병원을 거쳐 목포 성 콜롬반 병원으로 옮겼으나 계속 악화되어 88년 3월18일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 결국 회생을 하지 못하고 3월 25일 “나는 할 일이 많은데…”라는 말을 끝으로 운명하였다.
no6
김 남 주 (당시 48세)
1946년 전남 해남 출생
1964년 광주일고 입학 후 자퇴
1969년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문리대 영문과 입학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반대운동에 주도적 참여
1973년 반유신투쟁을 전개하다 투옥, 제적
1978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가입
1979년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 중 체포, 구속
1984년 첫시집 “진혼곡” 출간
1988년 9년 3개월만에 석방
1994년 2월 13일 새벽 췌장암으로 투병중 운명
1994년 2월 16일 민족시인 故 김남주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장례식 치룸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우리에게 8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남겨져 있는 김남주 시인은 고등학교 재학 당시부터 입시위주 교육에 반대하여 자퇴를 하고 대학 입학 후에도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제적되고, 고향 해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써 등단했다. 79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돼 80년대를 감옥에서 보내면서 우유갑이나, 밑씻개용 휴지 등에 쓴 시들을 묶은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을 통해 그 시대의 폭압적 현실의 한복판을 날카롭게 꿰뚫는 시를 발표했다. 88년 12월 석방된 뒤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및 한국민족 예술인 총연합 이사 등을 맡아 민족문화운동에 힘을 쏟아왔던 동지는 민족민중운동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며 오랜 감옥생활과 석방뒤의 과로 등이 겹쳐 얻은 췌장암으로 운명하였다.
m
김 말 룡 (당시 69세)
1927년 2월 2일 출생
1945년 11월 조선기계제작소 노조 선전부장
1946년 8월 노사분쟁사건 관련, 구속
1954년 3월 이승만 대통령 유시위반사건 관련 수배
1956년 10월 노총 자유당 기관단체 탈퇴운동 주도
1961년 7월 박정희 대통령 비난사건 관련 구속
1980년 5월 5·18 사건 관련 구속
1992년 4월 제14대 국회의원 (전국구)
1996년 10월 3일 오후 5시30분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한평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던 김말룡 동지는 당시 69세로 매우 건강한 체질로 노익장을 과시했는데, 1996년 10월 3일 워커힐 뒤 아차산을 조카와 함께 등반하던 도중 정상 부근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풍납동 소재 서울중앙병원으로 급송하였으나, 같은 날 오후 5시 30분경 끝내 숨을 거두었다. 동지는 노동자들이 탄압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새벽 세시에도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곤 했으며 운명하기 전날인 10월 2일에는 민주노총 투쟁본부 회의에서 밤10시까지 각 단사 위원장들과 함께 노동법 개정문제와 관련한 회의를 갖기도 하였다.
no6
김 병 곤 (당시 37세)
1971년 2월 부산고등학교 졸업
1971년 3월 서울대학교 상대 입학
1973년 유신반대 시위로 첫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가입
1985년 민민투사건으로 구속
1987년 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투쟁지도부 상황실장)
1990년 12월 6월 위궤양 및 위암 3기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김병곤 동지는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과 함께 21세의 가장 어린 나이로 구속되어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최후진술 첫마디에서 사형이 구형된 것에 대해 ‘영광입니다’ 라고 외침으로써 많은 감동을 주었다. 1987년 12월 구로구청사건으로 구속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던 중 건강에 이상을 느껴 교도소와의 싸움 끝에 외래진료를 받았으나 진행성 위암 3기로 판명되어 88, 89년 두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1990년 12월 6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그토록 바라던 민주세상을 보지 못한 채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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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병 구 (당시 35세)
1955년 1월 21일 전남 장성 출생
1971년 5월 독학으로 검정고시 준비
1975년-76년 삼영산업(주) 근무
1980년 민주화 운동에 참여
개헌 투쟁참여
1987년 6월 항쟁 참여
1988년 10월 18일 제13대 대선 및 총선 부정 고발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4층에서 투신
1990년 9월 2일 병상 생활 중 자결하여 운명
87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선거부정을 확신하던 김병주 동지는 이에 대한 추적조사를 통해 전면적인 조작선거였음을 발견하였다. 선거구와 투표구별로 퍼센트를 안배할 때 전면 조작하였고 투표함을 바꿔치기도 하고 이를 통해 지역감정과 민족분할을 꾀해 지배체제의 기득권과 정권 유지를 위해 민족에 대한 죄악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음을 폭로하고 88년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4층에서 가족과 학생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였다. 이로 인해 병상에서 투병하다 90년 9월 2일에 자결하였다.
no6
김 상 원 (당시 33세)
1957년 5월 7일 출생
1986년 3월 10일 영등포에서 불신검문에 항의하다가 연행됨
1986년 5월 6일 식물인간으로 투병생활 중 운명
1990년 12월 민사소송에서 경찰의 유죄가 인정됨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동지는 1986년 3월 10일 저녁 영등포 우체국 앞에서 검문에 항변했다는 이유로 영등포경찰서 직할 중앙파출소에 끌려갔다. 경찰들의 무차별 구타로 앞이빨 6대가 부러지고 두부 좌측 피하혈종에 비강내출혈, 좌측 안검부종에 뇌좌상 등 온몸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식물인간이 된 채 영등포경찰서에 의해 영등포 시립병원에 행려환자로 위장, 입원되어 철저하고도 조직적인 은폐 아래 중환자실에서 77일간을 신음하다 5월 26일 사망하였다. 동지의 가족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건의 목격자들을 찾아냈고, 집단 구타와 폭행으로 사망한 것이 분명해졌다. 이후 동지의 가족들은 사건을 은폐조작으로 미궁에 빠뜨리려는 경찰에 맞서 직접 증거를 수집하고 항의농성, 진정, 법정투쟁으로 5년여만에 법정에서 경찰에 의한 폭행사실을 밝혀내고 민사소송에서도 승리하였다. 이 사건은 의문의 죽음이 최초로 해결된 경우로 기록될 것이다.
no6
김 선 호 (당시 31세)
1961년 7월 전남 여천 출생
1991년 12월 부산시 장림1동 철거대책위 교육부장 역임
1992년 10월 총무 역임
1992년 11월 3일 “끝까지 투쟁하여 주거권을 쟁취하자”라고 외치며
철거에 맞서 싸우다 철거깡패의 집단구타로 운명
부산 팔송 시립공원묘지에 안장
92년 10월 26일 오후 1시경 부산시 사하구 장림지역은 처음으로 강제철거를 맞게 되었다. 100여명의 철거반원과 중장비를 동원한 그들은 무력으로 몰아붙였으나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과 김선호 동지는 LPG가스 배출로 위협하였고, 부상당한 부녀자의 몸부림으로 강제철거를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집을 지켜냈다는 기쁨도 잠시, 11월 3일 오전 대대적인 강제철거가 다시 감행되었다. 공권력이 투입되어 철거깡패를 돕는 상황이었고 주민들이 함부로 다루어지고 이리저리 끌리며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동지는 참다못해 그들과 몸싸움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집단구타로 운명하게 되었다.
no6
김 순 복 (당시 29세)
1965년 경남 통영출생
1984년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입학
1991년 경상대학교 총학생회 연대사업국장
1993년 전국농민회 총연맹 경남도연맹 간사
1994년 2월 1일 손구용 동지와 함께 서울 농민대회 참석 도중
도로에서 참사를 당하여 두 개골 파열로 그 자리에서 운명
동지는 1994년 2월 1일 “UR재협상, 국회비준 거부, 농업대개혁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 참석을 위하여 진양군 농민회 사무실에서 아침 6시 25분경 서울로 출발하여 전농의 지침에 따라 도방송차량을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이 방송차량을 손구용, 김순복 동지가 맡기로 하고, 진양군 농민회 본대 버스 뒤를 따라 손구용 동지가 운전하는 1톤 트럭이 진주→김천 방면으로 동시에 출발하였다. 신청군의 도로는 전날 내린 비와 눈으로 얼어 빙판길이었다. 두 동지가 탄 차량이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 남효부락앞 S자형 커브지점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반대편 언덕쪽으로 추락지점에서 느티나무(지름 약 30㎝)와 충돌하여 김순복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즉사하였으며 손구용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경상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다 저녁 8시 50분경에 운명하였다.
no6
김 영 자 (당시 50세)
1944년 3월 2일 충남 출생
1963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가정학과 입학
1966년 대학 졸업, 정읍농림고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
1969년 3월 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 시설원예 농사 시작
1975년 지역탁아소인 ‘원터 어린이집’ 운영
1977년-78년 ‘가톨릭농촌여성회’ 초대회장 역임
1986년 성남민주화운동연합 여성분과 위원장
1989년 경기도 여성농민위원회 총무 역임
1990년 ‘큰우리 소비자 협동조합’ 이사장 활동
1993년 3월 위암진단을 받고 투병
1993년 9월 11일 오전 9시 30분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1966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뒤 정읍농고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이어진 동지의 삶은 자주적인 여성농민운동 조직의 건설과 지역운동의 대모로서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25년간 “고난의 가시밭길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1977년 동지가 산파역할을 한 한국가톨릭 농촌여성회는 해방 이후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농민 단일조직으로서 이후 89년 전국여성농민위원회를 거쳐 현재는 전국 60개 군에 조직을 갖춘 ‘전국여성농민회 총연합’으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슬하에 4남매를 둔 어머니이면서도 아내로서의 역할을 소중히 여겼던 동지는 여성농민의 권리회복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삶을 살아갔으며, 결국 위암선고를 받고 투병 중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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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환 (당시 26세)
1965년 2월 15일 강원도 삼척 출생
1984년 2월 삼척고등학교 졸업
1984년 3월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입학
1989년 한겨레사회연구소연구원
(한미군사관계, 평화, 군축문제, 남북관계, 통일문제 등을 연구)
1991년 4월 7일 자취방에서 변사체로 발견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김영환 동지는 명지대생 강경대 동지가 운명한 그 다음날 자취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김영환 동지는 4월 25일까지 자취방에 있는 모습을 집주인이 보는 등 생존한 모습이 보였으나, 그후 행적이 눈에 띄지 않았다. 동지는 한겨레사회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민족문제, 군축문제, 통일문제 등에 대한 정력적인 연구와 논문발표 등의 활동을 벌였고, 죽음 직전 윤석양 후원사업회 관계자들을 만나 군 내부의 인권문제에 관한 자료를 전달 받았으며 그후 기무사 요원이 동지의 행적을 감시한 것이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동지의 사인에 대해서 밝히지를 못하고 가족과 동료들에 의해 장례가 치루어졌다.
no6
김문 영 수 (당시 29세)
1953년 11월 10일 출생
청량리 초등학교 졸업
진아교통 버스기사로 일함
1982년 8월 19일 경찰에 연행되어 구타와 폭행을 당함
1982년 8월 22일 광주적십자 병원에서 운명
행려병환자로 위장된 채 해부학 실습용으로 사용됨
문영수 동지는 1982년 8월 19일 저녁 9시경 광주시 중흥동 소재 덕천여인숙에서 김광호와 함께 술을 마시다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사건현장에서 동지를 검거하여 역전파출소로 연행했다. 김광호는 피를 흘리며 효성병원으로 후송되고 문영수는 서부경찰서 형사계로 인계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문영수는 연행될 당시 아무런 부상도 없었고 건강상태도 매우 좋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연행 다음날 1982년 8월 20일 오전 9시경 순찰중 중흥동 노상에서 신음중인 환자를 발견하여 광주시 유동 소재 조세현 외과에서 응급조치를 시킨 후 광주 적십자병원에 행려환자로 허위 입원시켰으나 1982년 8월 22일 오후 6시경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동지의 사체는 본적, 주소 일체불상인 행려병 환자로 취급되어 1982년 8월 23일 전남의대 해부학 교실로 넘겨지고 몇개월간 보관되다 실습용으로 사용되었다.
no6
문 익 환 (당시 76세)
1918년 만주 북간도 출생
1932년 중학교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로 중퇴
1976년 ‘3·1 민주 구국사건’으로 첫 투옥
19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89년 3월 방북
1991년 6월 6일 소위 ‘분신정국’에서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 활동,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
1992년 1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93년 4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운동 제창
1993년 8월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4년 1월 ‘새로운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문익환 목사는 한마디로 암울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며 줄곧 재야 민주운동을 주도해 온 정신적 지주였다. 19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사건’을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2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첫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된 이후 삶의 절반 가까이를 감옥에서 보내었다. 그 과정에서 85년 3월 민주통일국민회의, 민중민주운동 협의회 등 당시 재야단체를 통합한 민통련 발족을 주도하고 초대 의장으로 활약했으며 89년초 전민련의 출범 후에는 전민련 고문을 맡는 등 재야운동의 대부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통일은 됐어’라고 힘주어 외치시던 목사님은 유신의 압제에 분연히 맞서고 이후 치열한 반독재 투쟁과 통일운동으로 일관해 오신 민족의 큰별이었다.
no6
문 한 영 (당시 77세)
1919년 원산 출생
1930년 원산부두 노동자파업에 참가
1944년 ‘건국동맹’ 원산지부 참여
일제패망 뒤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1960년 4·19 이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협의회’ 조직위원장
1980년 5·16쿠데타로 투옥
1989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협의회’ 재건에 힘씀
1996년 4월 18일 운명
수유리 도봉산 묘지에 안장
no6
문 병 일 (당시 39세)
1958년 12월 2일 경기도 파주 출생
1989년-1994년 삼성재단 산하 중앙개발연구원에서 근무
(노동조합 발기인으로 활동)
1995년 9월 28일 구갈 철거민 대책위원회 입회
1996년 4월 6일 구갈 철거민 대책위원회 조직부장
1997년 2월 15일 노점단속으로 빼앗긴 생계수단을 찾기 위해
파출소에 방문했다가 경찰관들의 집단폭행으로 두개골이 으깨진 채
뇌사상태에 빠져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다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97년 2월 2일 닭꼬치 등을 노상에서 팔며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가던 민병일 동지는 경기 용인시 노재 신갈 파출소에 민원을 제기하러 갔다가 파출소의 경찰관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두 개골이 8cm가량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곤봉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져 있던 민병일 동지는 심각한 외출혈로 인해 자꾸 부어오르는 뇌의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기 위해 두 개골을 열어 놓은 처참한 상태로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게 하여 생명을 유지하던 중 끝내 운명하였다. 경찰측에서는 의경이 민병일 동지를 밀어서 다쳤다고 발표하였으나 정황이나 의사판단으로 보아서는 곤봉에 맞아 머리가 8cm함몰된 것으로 보여진다.
no6
박 상 구 (당시 20세)
1967년 7월 6일 경남 울산 출생
1986년 대구 공업고등학교 졸업
하사관 입대
1987년 5월 11일 운명
1986년 하사관에 입대한 동지는 87년 5월 11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군에서는 평소 동지가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많이 못했다’며 비관을 했다고 하며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했으나, 시체에는 오른쪽 귀부분과 얼굴, 몸은 깨끗한 데 왼쪽 귀부위와 목, 어깨부분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no6
박 성 은 (당시 21세)
1969년 12월 광주 출생
1985년 2월 광주 동성중학교 졸업
1989년 2월 광주 농업고등학교 졸업
1990년 4월 9일 방위병으로 입대
1990년 5월24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고교시절부터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하며 의식을 키워왔고, 방위근무 중이었던 동지는 90년 5월 사망 직전에 쓴 일기에는 “오월의 혁명정신을 계승하자!”라고 적기도 했다. 제31사단 사단직할 11병참선 경비대대에 배치된 동지는 부대내에서 발생한 구타사건과 군부대 내의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행태를 고발하는 문건을 작성한 후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주일 가량 부대 내에서 모종의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동지는 이 조사를 받고나서 외출하였으나 행방이 파악되지 않았다가 5월 24일 새벽 5시 40분경 거주지인 광주 중앙교회내 유치원 놀이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건 이후 5월 15일 작성한 문건이 모두 분실되었고, 부대에서 일주일 이상을 억류하였음에도 그에 대한 해명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단순한 자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no6
박 순 덕 (당시 34세)
1963년 2월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6월 김창수와 결혼, 슬하에 남매
1995년 2월 전농3동 철거민 대책위 가입
1997년 7월 25일 철거반대 철탑망루 농성 중 철거깡패들이
폐타이어 등으로 방화를 하고 화염병을 투척하자 질식사를 피하기 위해
저항하던 중 불길에 휩싸여 투신, 운명
97년 7월 재개발지역인 동대문구 전농3동 철거민들은 ‘대책없는 강제철거 반대와 가수용 입주’를 요구하며 철제망루에서 한달째 농성을 벌였다. 그러던 7월 25일, 오전 9시 30분경부터 재벌회사인 선경건설과 재개발조합은 용역회사인 적준토건 소속 철거깡패 300여명을 동원하여 전투경찰 600여명이 출동한 가운데 강제철거를 시작하였다. 철거깡패들은 철탑망루 주위에 옷가지와 페타이어를 태워 유독성 연기를 뿜어내 두더지잡기라도 하듯 농성 중인 철거민들의 질식을 기도하였다. 그러면서 철거깡패들은 철탑망루에 다가가서 철거민들이 1층에 설치해 놓은 방벽을 뜯어내고 옷가지와 페타이어들을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오후 6시 30분이 되자 철제망루 밑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불기둥이 치솟아 순식간에 철탑망루를 뒤덮었다. 이 과정에서 박순덕 동지는 18M 높이에서 뛰어내려 운명한 것이다.
no6
박 현 채 (당시 61세)
1934년 11월 3일 전남 화순군 출생
1947년 광주수창국민학교 졸업. 독서회 활동,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실천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음
1947년 광주서중학교 입학, 민애청 활동
1950년 10월-1952년 8월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
1955년 전주고등학교 3년에 편입,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입학
1963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강사, 인혁당 사건으로 중단.
1979년 ‘임동규간첩사건’에 연루되어 1년 복역
1980년 ‘134인 지식인선언’에 참가
1989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
‘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 출판
1995년 8월 16일 뇌줄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운명
박현채 선생은 외세를 배제하고 민족자립 경제를 주창한 남한의 대표적 민족경제학자였으며, 70-80년대 가혹한 민주화운동 탄압기간 동안 민주화 운동가로, 빼어난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고난을 겪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동지는 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16살의 나이에 빨치산으로 입산했다가 52년 8월 복부 관통상을 입고 하산, 55년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한국농업문제연구회’ 간사로 있으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하에서 한국 국민경제의 독자적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했다. 64년 박현채 선생은 소위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어 도예종 은닉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이후 두차례 복역과 구금을 당했다. 동지의 민족경제론은 한국 자본주의가 종속의 길로 치닫던 시기에 민족의 자주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해 7-80년대 민중운동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제공했다.
no6

성 순 희 (당시 55세)

1938년 9월 부산 영도 출생
1958년 부산 남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1959년 3월 1일 손병선씨와 결혼
1960년 4월혁명 때 앞장선 남편이 5·16 쿠테타 이후
투옥되자 생선장사를 하며 남편 옥바라지를 함
1989년 10월 큰딸 민옥이 해직되자 전교조 교사가족회
서울지역회장, 전국 부회장 맡음
1992년 9월 26일 남편이 안기부에 연행 후 수배생활을 시작
1993년 7월 7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1993년 8월 15일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성순희 동지의 삶과 죽음은 그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4·19때부터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손병선 선생과 민주화, 노동운동 등에 헌신하고 있는 세 딸의 뒷바라지로 한평생을 살아온 동지의 고난과 역경의 삶은 이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어머니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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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구 용 (당시 28세)
1966년 경남 진양출생
1985년 경상대학교 행정학과 입학
1991년 경상대학교 사회과학대 부학생회장
1991년 진양군 농촌활동 도중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
1993년 진양군 농민회 협동사업국 영업부장
1994년 2월 1일 김순복 동지와 함께 서울 농민대회 참석 도중
도로에서 참사, 병원으로 옮겨 입원 중 운명
동지는 1994년 2월 1일 “UR재협상, 국회비준 거부, 농업대개혁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 참석을 위하여 진양군 농민회 사무실에서 아침 6시 25분경 서울로 출발하여 전농의 지침에 따라 도방송차량을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이 방송차량을 손구용, 김순복 동지가 맡기로 하고, 진양군 농민회 본대 버스 뒤를 따라 손구용 동지가 운전하는 1톤 트럭이 진주→김천 방면으로 동시에 출발하였다. 신청군의 도로는 전날 내린 비와 눈으로 얼어 빙판길이었다. 두 동지가 탄 차량이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 남효부락앞 S자형 커브지점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반대편 언덕쪽으로 추락지점에서 느티나무(지름 약 30㎝)와 충돌하여 김순복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즉사하였으며 손구용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경상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다 저녁 8시 50분경에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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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연 숙
1994년 12월 4일 수원2지구 세입자 대책위 결성
1996년 6월 18일 철거반대 고공농성을 위한 골리앗 설치
1996년 9월 5일 한국토지공사의 강제철거에 맞서 사수투쟁 승리
1996년 2월 5일 한국토지공사 철거깡패와 공권력 동원, 골리앗에 방화자행.
불을 피하기 위해 18미터 높이의 골리앗에서 투신하였으나 운명
정권과 한국토지공사의 반민중적 정책으로 인해 단 한 평의 삶의 보금자리마저 빼앗길 위험에 처한 수원2지구 철거민들은 1994년 12월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95년 골리앗을 건립하여 8월부터 150여일간 고공농성을 전개해왔으며, 9월달 한국토지공사의 강제철거에 맞서 수지 2지구 철거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96년 2월 5일 백골단 200여명과 철거깡패 100여명이 골리앗에 기습적으로 진입하였다. 당시 골리앗 위에는 주민 4명과 학생 1명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철거깡패들과 백골단들은 폭력을 휘두르며 골리앗에 올라왔고 그 과정에서 골리앗에 불이 붙었다. 백골단과 철거깡패들은 18M높이의 철탑이 화염에 휩싸인 채 5층 꼭대기 위에서 살려달라는 동지들의 외침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거민들의 보금자리를 싹쓸이 철거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연숙 동지는 투신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운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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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용 찬 (당시 25세)
1966년 제주도 남제주군 출생
1982년 2월 서귀포 고등학교 졸업
1985년 3월 제주대학교 인문대 사학과 입학
1987년 군입대로 휴학,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자진 중퇴
1989년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 가입
1990년 UR반대와 제주도개발 특별법 반대투쟁
1991년 11월 7일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 옥상에서
“제주도 개발 특별법 저지”등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투신
제주도 서귀포 신례리에 안장
제주도를 끔찍이 사랑했던 양용찬 동지는 89년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에 가입하여 낮에는 타일공으로 일하면서 청년회 내의 ‘농민사랑’ 모임의 구성원으로 활동을 하였고, 그 후 농민사랑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동지는 ‘서귀포지역 문제 대책위’ 에 참가하여 서귀포 지역 개발 문제, UR과 제주도 개발 특별법, 농수산물 수입개방 및 지역 감귤문제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91년 11월 7일, 양용찬 동지는 ‘세계의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 제주도를 원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특별법 저지”,”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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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원 진 (당시 40세)
1952년 3월 18일 충북 청원군 출생
1973년 충남대학교 입학
1975년 유신헌법 철폐 시위 주도로 제적
1980년 유신정권 붕괴로 복교
충남대학교 학생회장 역임
유신잔당 퇴진, 노동 3권 보장 등 민주화 요구 시위로 구속, 투옥
1985년 충남민주화운동 청년연합 초대의장
1987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운동 공동의장
1992년 9월 11일 충남대 부속병원에서 암으로 투병 중 운명
오원진 동지는 충남대에 입학하여 민주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어 감옥생활을 하였으나, 출감한지 채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84년에 흩어져 생활하던 동지들을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충남민주화운동연합을 결성하였다. 정권의 숱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민청을 지켜나간 동지는 민중교회 야학,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가톨릭청년회, 기독청년회 등 지역 청년운동을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항상 대중과 함께 하고자 하였고, 운동적 시각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었으며, 운동하는 친구들이 도식적이고 소아병적인 경직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던 동지를 뵤면서 많은 사람은 감동을 받았다 한다. 그러나 1992년 9월 11일 암과의 투병을 안타깝게 운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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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한 섭 (당시 28세)
1958년 충남 아산 출생
1975년 천안 농업고등학교 축산과 졸업
아산군 인주면 청년회장 영농후계자 회장 역임
1986년 3월 10일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정부의 영농정책에 항의하여 음독
1986년 3월 13일 운명
오한섭 동지는 81년 새마을 청소년 경진대회 낙농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축산기술이 뛰어났고, 잘 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81년 영농후계자 자금 200만원을 받아 한우를 길렀으나, 당시 전경환 새마을 운동본부에서 외국소와 쇠고기 수입을 하자, 소값이 폭락하게 되었고, 밀리는 사료값을 갚기 위해 계속 소를 팔이 급기야는 85년 11월에 송아지 14마리를 팔아 밀린 사료값 500만원을 갚자 5마리의 송아지밖에 남지 않았다. 오한섭 동지는 논밭 한뙤기 없는 처지에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농협 빚 420만원도 갚아야 하고 많은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는 동지는 영농 후계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다. 농민의 생산결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분개하여 ‘용기! 패기! 사기! 빚! 빚! 420만원’이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음독하여 3일만에 운명하였다. 그의 죽음은 살농정책으로 인한 농촌파탄에 대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대한 항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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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덕 인 (당시 28세)
1967년 12월 전남 신안군 출생
1995년 6월 아암도에서 노점 시작
1995년 11월 25일 노점 철거에 반대 농성중 실종
1995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철거 감시용 망루에서
농성 중에 있던 이석근씨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이덕인 동지는 인천시가 휴식공간 목적으로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하자 95년 7월 3일부터 장애인 22명, 빈민 20명과 함께 노점을 시작했고, 이에 구청에서 수차례에 걸쳐 노점 철거를 지시하자 그들은 철탑망루를 설치하여 대항하였다. 11월 24일 드디어 경찰병력과 용역깡패 1,500여명이 포크레인으로 강제 철거를 시작하자 시장면담을 요구했으나 강제로 시청밖으로 끌려나왔고, 망루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덕인 동지는 25일 7시 30분경 망루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행방불명되었고, 아암도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밧줄로 손이 앞으로 가지런히 묶여 있었고 양쪽 팔과 얼굴부위에 상처로 간주된 피멍이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4급 장애인이라는 힘겨운 신체 조건하에서도 노점생활로 기반을 꾸리고 이덕인 동지는 현정권과 인천시 당국의 대책없는 노점철거로 인해 살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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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범 영 (당시 39세)
1955년 강원도 원성군 출생
서울고등학교 졸업
197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1976년 12월 유신반대 시위주도로 구속, 항소심에서 2년6개월 선고받음
1979년 7월 형집행 정지로 출감,
‘전국 병역대책위원회’를 조직, 위원장으로 활동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집행국장
1988년 민청련 의장
1990년 전국 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의장
1992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의장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이범영 동지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위대한 사상가도, 뛰어난 경세가도, 불세출의 지략가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천재의 광휘가 번뜩이는 타고난 글쟁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건설하고, 의장을 지냈으며,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외 의장을 역임하는 등 개인의 안일과 욕망을 뒷전으로 밀쳐 놓고, 이 사회와 세계를 뒤바뀌고자 했던 활동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운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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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 순 (당시 68세)
1926년 전남 광주 출생
1985년 막내 아들 송광영 동지 분신으로 운명
1989년 유가협 회원으로 활동
1991년 전국민주화 유가족 협의회(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부회장 역임
강경대 동지 치사경관 공판 도중 부당한 판결에 항의하다가
1년 6개월 수배생활
1993년 송광영 동지 묘역을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함
1994년 1월 2일 문익환목사 장례식에 참여하고 충격받음
1994년 1월 26일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1985년 경원대에 다니던 막내아들 송광영 동지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원안정법 철폐하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분신하여 운명한 뒤 이오순 동지는 서울 기독교병원에서 화마와 싸우면서도 조국의 자주화와 민주화, 통일을 부르짖는 아들 광영과 조국의 어머니로 살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민주화를 위한 여러 투쟁에서 ‘감동의 황색 가죽가방’으로 불리우며 백골단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동지는 1991년 유가협 부회장직을 수행하며 회원 조직화에 앞장서다 강경대 동지 치사 경관 공판 도중 부당한 공판에 항의하다 법정소란 혐의로 1심에서 1년 6월동안 수배생활을 하였다. 94년 문익환 목사님의 서거로 충격을 받고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다 결국 심장병으로 운명하여 문익환 목사님과 아들이 묻힌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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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 기 (당시 23세)
1987년 성남 은행동 빈민협의회 결성
1989년 성남 하대원동 철거반대 투쟁참여
1990년 5월 17일 당국의 무책임한 철거를 막아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메어 자결
이원기 동지는 성남 은행 2동 13통에서 사글세방을 전전하다 가족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강제로 쫓겨나다시피 하여 오갈데 없는 막연한 상황에서 1987년 3월경 결국 시유지에서 군용 텐트를 치고 전기도 없이 거주하는 중에 성남 시청 철거반들의 악랄한 철거만행이 시작되어 철거반들의 온갖 협박과 철거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항거하였다. 은행 2동을 중심으로 빈민협의회를 구성, 김광수 목사님을 구심점으로 하여 1989년 하대원 철거반대투쟁에 연대 참여하였다. 수차례 철거 위협을 받고 “이 지역이 철거를 당한다면 차라리 내 한목숨 버리겠다. 시장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말을 하면서 괴로워하던 이원기 동지는 이웃 주민 앞으로 남긴 유서에 처와 자식을 부탁한다는 내용과 13통 통장 앞으로는 어려운 주민들인 만큼 철거를 막아달라는 내용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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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식 (당시 37세)
1952년 5월 충북 중원군 출생
1985년 ‘성흥사’에 입사, ‘노동조합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부위원장 역임
1987년 9월 한국의장 취업
1988년 5월 노동조합결성추진과 조합활동에 대한 감시와
해고위협으로 노동자 생활정리, 한겨레신문 거제지국 총무,
대우조선 노동자의 파업과 농성지원
1989년 6월 노점활동 시작
1989년 10월 16일 전국적인 노점단속에 항의하여 분신
1989년 12월 11일 57일간의 투병 끝에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이재식 동지는 고향에서 삶터를 찾아 거제로 들어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성실하게 살아갔다. 신문사 지국에서 일하면서 한편으로 부인과 힘을 합쳐 호떡을 팔아 가난한 살림에 보태 보려고 나선 이재식 동지의 노점활동을 사무소는 대책도 없이 단속, 철거만 했다. 1989년 10월 16일 신현읍 개발과장을 반장으로 한 노점단속반이 거제군 농촌지도소 앞 호떡 손수레를 끌고 갔다. 부인이 이에 항의하던 중 밀가루 반죽을 오토바이에 싣고 온 남편 이재식 동지가 통사정을 해도 듣지 않고 읍장은 뒤늦게야 나타나 콧방귀만 뀌며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자 12시 40분경 울분을 못 참은 동지는 그만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불을 당겼다. 이를 본 직원들이 멍하니 보는 사이에 3도에 이르는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거제 기독병원, 마산 고려병원, 부산대병원 등을 찾아갔으나 모두 진료를 포기하여 영도의 해동병원에서 생사를 헤매다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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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 순 (당시 39세)
1952년 3월 19일 전라남도 순천 출생
1964년 2월 순천 남국민학교 졸업
1991년 5월 18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 철교위에서 분신 후 투신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이정순 동지는 어려운 환경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가정살림과 동생들 학비를 뒷바라지 해주었다. 그 후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가정형편이 매우 힘들었고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1남 3녀를 뒷바라지하며 꿋꿋이 버텨나갔다. 평소에 공부를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동지는 어려운 시련에서도 끊임없이 공부했다. 평소에 노트에 많은 글과 시를 썼는데 분신 뒤 동지의 방에서 그런 노트가 3권이나 나왔다고 한다. 그 뒤 이정순 동지는 성당에 열심히 다녔고 독실한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의 희생정신에 대해 깊이 감화받았던 듯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91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 경 강경대 동지의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 정문앞 철교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공안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불덩어리가 되어 투신하였다.
no6
이 태 춘 (당시 27세)
1960년 2월 7일 부산 출생
1986년 2월 동아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1986년 3월∼87년 3월 주식회사 화승 자재과 근무
1987년 3월 2일 태광고무(주) 무역부 입사
1987년 6월 18일 6월 민중항쟁의 시위 도중
부산시 좌천동 육교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
1987년 6월 24일 부산시 봉생병원에서 뇌수술하였으나 운명
양산 가톨릭 공원묘지에 안장
동지는 1987년 6월 18일 부산 좌천동 육교 시위에서 전경들이 다연발탄과 직격탄을 쏜 뒤 육교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이날 저녁 좌천동 시위는 6월 항쟁 중 부산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시위였었고, 발견 당시 상황은 행진 중 전면에 있던 경찰이 갑자기 다연발탄과 최류탄을 난사하였기 때문에 그곳에 밀집하여 있던 사람들이 정신없이 윗쪽으로 피하면서 흩어졌고, 사람들이 떠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등 극도로 혼란스런 상태였다. 시위대가 지나간 뒤, 시민 4명이 동지를 지나가는 승용차에 태워서 대연동 재희병원으로 후송했고 그 당시 동지는 눈을 갸냘프게 움직였으나, 여전히 의식이 없었고 옷에 하얀 최루가루가 뿌옇게 묻어 있었다고 한다. 뇌수술을 하였으나, 1987년 6월 24일 20시40분경 운명, 부검 후 1987년 6월 27일 10시 범일성당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no6
임 기 윤 (당시 58세)
1922년 12월 27일 평남 용강군 오신면 석정리에서 출생
1951년 중앙신학교 신학과 졸업
1961년 중앙신학교 사회사업과 졸업
1966년 기독교 대한감리회 목사 안수
1971년∼72년 부산기독교 연합회 총무
1971년 7월 2일 부산 기독교교회 협의회 총무
1979-80년 부산신학교 운영이사장
1979-80년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앙연회 부산지방 감리사
1980년 7월 19일 국군보안사령부 부산분실에 연행됨
1980년 7월 21일 부산 통합병원으로 옮김
1980년 7월 26일 운명
임기윤 목사는 암울한 유신치하인 1975년 2월 16일 범교단적으로 40 – 50명의 목회자가 조직한 ‘사회정의구현 부산 기독인회’의 회장으로 취임하여 함석헌 선생, 서남동 목사, 문동환 목사 등의 초청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이를 이유로 국군보안 사령부 부산분실에 참고인으로 불려간 1980년 7월 19일 이후 3일만인 21일,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가 26일 순교하였다. 보안사 측에서는 가혹행위는 전혀 없었고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평소 목사는 혈압이 높지 않았으며 부인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뒷머리 왼쪽이 3센치 가량 찢어져 있고 그 곳에 피가 흘러 말라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임기윤 목사는 보안사 내에서의 폭행, 고문 등 가혹행의로 인하여 운명하였거나 설혹 육체적 고통은 당하지 않았더라도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공포분위기에서의 정신적 고문으로 운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no6
장 준 하 (당시 57세)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 출생
1932년 평양 숭실학교 입학
1940년 4월 일본 동경 일본 신학교에 입학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중국에 끌려가다 탈출
1945년 1월 중국 중경에서 광복군에 편입, 광복군 대위에 임관됨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으로 입국
1947년 12월 조선 민족 청년단에 참가
1964년 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에 참가
1965년 조국수호협의회에 참가, 한일조약 반대투쟁에 가담
1967년 6월 옥중 출마로 동대문 을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박정권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함
파주 천주교 나자렛 묘역에 안장
오랜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으로 재야 대통령이라는 칭송까지 들은 민족의 지도자였던 장준하 동지는 72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구축해 갈 때 가장 선두에 서서 민주세력들을 결집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74년 1월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74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후 지속적인 유신헌법 철폐를 목적으로 한 개헌운동의 노선단일화를 위해 민주통일당을 탈당하였다. 그러던 중 75년 8월 17일 장준하 동지가 약사봉 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자 박정희 정권은 등산을 하다가 실족, 익사한 것으로 사건을 서둘러 종결지었다. 이는 재야 지도자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암살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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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상 순 (당시 25세)
1966년 11월 1일 전라남도 보성 출생
1985년 2월 보성고등학교 졸업
1991년 5월 22일 오후 7시 25분경 전남대 병원 영안실 위에서
“노태우 물러가라”며 투신
1991년 5월 29일 전남대 병원에서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보성고 김철수 동지의 고교 선배인 정상순 동지는 노동자로서 여러 직종에 종사하였다. 91년 계속되는 분신에 괴로워하던 중 고교 후배인 김철수 동지가 분신하여 전남대 병원에서 투병을 하자 병원을 찾아와 두 번씩 울고 갔다고 한다. 5월 22일 전남대 병원 영안실 위에서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자”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하여 5월 29일 전남대 병원에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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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상 율 (당시 48세)
1941년 7월 10일 충남 논산군 강경읍 출생
1970년 이후 양복 재단사 생활
1989년 돈암, 동소문동 세입자 대책위원회 부회장 역임
1989년 2월 18일 술에 취한 가옥주가 휘두른 칼에 찔려 운명
용미리 서울시립 묘지에 안장
88년 4월 결성한 돈암, 동소문동 세대위는 1년동안 수차례의 강제철거와 조합이 고용한 깡패들과의 계속되는 충돌에도 불구하고 삶의 자리를 찾기 위한 불굴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정상률 동지가 운명한 2월만 해도 2번의 강제철거를 시도했으나 주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막아내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던 1989년 2월 18일 돈암동 세입자 김성원씨 집에 가옥주 신광선씨가 술에 취한 채 당장 집을 비우라고 소란을 피우자 김성원씨의 부인이 공포에 질려 세입자 대책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였고, 달려온 동지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하자”며 다가갔다. 그때 신광선은 우유각 속에 감추었던 식칼을 꺼내어 동지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급히 고대 혜화병원으로 옮겼으나 동지는 운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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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성 규 (당시 23세)
1965년 출생
1983년 충북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5년 인문대 학생회장 당선
1986년 학내시위 주도로 구속, 집행유예 선고
1987년 청주 민청 총무
1988년 청주 민청 조직부장
1988년 8월 14일 수련회 도중 익사
87년 공정선거 감시단으로도 활동을 하였고, 88년 청주지역 민주청년연합에서 지역운동을 하던 정성규 동지는 8월 통일문제 시민강좌를 마치고 수강생들과 함께 매포수양관에서 수련대회중 돌연한 사고로 익사하였다. 다음은 추모제에서 후배가 평소 동지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동지를 잃는 아픔 속에서도 억센 생명력이 다시 일어서야 함을 알기에 못다한 말씀이 무엇임을 알기에 눈물을 훔치고 나서렵니다. 형! 지켜보고 계시지요. 시련의 칼바람 속에서도 청년이 조각난 강토에 굳세게 서게 되는 그날까지 형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죽어서도 우리들 속에 살아계시는 생명을 압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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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연 관 (당시 21세)
1966년 12월 강원도 삼척군 출생
1973년 3월 철암 국민학교 입학
1978년 2월 대구 남산국민학교 졸업
1981년 2월 대구 경구중학교 졸업
1984년 2월 포항 대동고등학교 졸업
1986년 5월 군입대
1987년 12월 4일 운명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
정연관 동지는 87년 12월 4일 부재자 투표날 운명하였다. 5일 새벽 5시 경북 대구에 있는 집으로 온 사망통고를 받고 달려간 가족들에게 군관계자는 “사흘 후에 훈련이 있어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병장 백재윤이 내무반에서 사병들을 9명 침상 끝에 세우고 두 차례나 돌아가며 주먹으로 구타하여 정상병이 관물대에 머리를 받혀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신의 정황으로 보아 전혀 그렇지 못했다. 목뒤에 시퍼렇게 피멍이 들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또한 양 엉덩이에도 피멍이 들어 있었으며 등뒤에도 청자색으로 구타당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 두 차례에 의한 주먹질로 사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족들은 “제대한 사람으로부터 정연관 동지가 야당을 찍어 기합받다 사망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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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영 래 (당시 43세)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출생
1965년 3월 서울대학교 법대 입학
1969년 3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입학
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1983년 변호사 개업, 전태일 평전 집필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변론
1990년 9월 폐암 3기로 입원
1990년 12월 1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동지는 서울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 7부정선거 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공명선거쟁취 등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후 6년 가까이 피신생활을 하던 중 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고, 특히 3년여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는가 하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망원동 수재사건, 대우어패럴사건,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제 철폐)등을 변론하였고, 변호사 협의회 인권보고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도지침사건, 박길재 사건(상봉동 진폐증 보상문제)을 담당하였으며, 기타 노동, 빈민, 공해, 학생운동 관련사건 등 인권변호에 전력하던 동지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들고 나서 지병인 폐암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 한 채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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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광 석 (당시 39세)
1948년 7월 11일 충남 서산군 안면면 출생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입학
1975년 5월 김상진 동지 추모시위로 구속
1983년 본격적인 문학평론 활동 시작
1984년 3월 14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창립 실행위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국장
1985년 시집 ‘밧줄을 타며’, 사회문화론집 ‘물길처럼 바람처럼’ 발간
1987년 7월 12일 폭주하는 택시에 받혀 운명
팔당 공원묘지에 안장
1975년 4월, 서울대 김상진 동지가 할복자살하는 등 유신반대운동이 고조되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5월에 김상진 동지 추모시위가 힘차게 벌어지자 사범대 시위책임을 맡았던 채광석 동지는 체포, 구속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40여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이때의 고문체험으로 <애국가>, <검은 장갑> 등의 시를 쓰기도 했다. 동지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창립을 계기로 이후 타계할 때까지 문학운동을 비롯한 문화운동 전반에 걸쳐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화예술분과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박노해 시인을 발굴하여 민중문학의 한 맥을 이루게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동지는 1987년 ‘여성단체연합’ 주최로 열린 ‘민주시민대동제’에 참여하였다가 뒤풀이를 끝내고 귀가하던 길에 폭주하는 택시에 받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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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성 묵 (당시 62세)
1930년 11월 11일 경북 영일군 출생
1951년 포항 중고교 1회 졸업
서울대학교 물리대 수학과 3년 수료,
한국 신학대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신학 대학원 졸업
1976년 1월 1일 중부교회 전도사취임, S.C.M (K.S.C.F 전신) 총무 역임
V.S.I.S 부산 학생과장 역임 미공보원)
부산 Y.M.C.A 총무, 부산 N.C.C.회장
유신반대투쟁, 10월 부마항쟁주도
국민연합공동 의장
1985년 6월 20일 한울장애인자활센터 창립
1990년 7월 2일 한울장애인어린이집 개원
구 신민당 최고위원 역임
1992년 3월 21일 지병으로 운명
선지자의 철저한 고독속에 살다간 부산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며 야당통합의 주역으로 활동한 최성묵 목사는 대학시절 한국기독학생총연맹에서 활동하면서 서서히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고 YMCA총무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당시 강한 보수성을 띄고 있던 YMCA는 목사에게 한계를 느끼게 했고, 이에 중보교회에 들어가 46세의 나이에 목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부교회를 통해 부산민주화운동을 더욱 확대해나갔고, 1980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결성하여 6·10항쟁을 이끌어내는 선두주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 이후 목사는 우리 사회에서 자활의 기회를 박탈당한 징애인에게 동등한 한 인간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한 운동의 저변확대를 위해 한울장애자 자활센터를 건립하고, 한울 장애인 어린이집을 개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92년 지병으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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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환 (당시 36세)
1959년 출생
1994년 6월 방배역 부근에서 테이프 노점상 시작
1994년 6월 노점단속으로 전치 8주 부상
1995년 3월 8일 9시 45분경 서초구청의
살인적인 노점상 단속에 분신으로 항거
1995년 3월 21일 새벽 1시 50분 운명
용인 가톨릭 묘지에 안장
척수 장애와 교통사고로 인해 1급 1호의 중증장애인이었던 동지는 서초구 방배역 부근에서 오토바이에 가판을 달고 테이프 노점상을 시작하여 삶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서초구청의 노점상 탄압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러한 가운데 95년 3월 8일 오후 8시 30분경 서초구청의 살인적인 단속에 장사하는 스피커와 밧데리통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그날 오후 9시 30분경 서초구청을 방문 담당자를 면담 후 압수된 물품을 찾으려 했으나 심한 모멸감만 받고 좌절당했다. 이에 분노한 동지는 결국 9시 45분경에 분신하고 3월 21일에 운명하였다. 세계화를 지향한다는 문민정부에서조차 짓밟힐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동지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불사른 것이다.
no6
최 종 길 (당시 41세)
1932년 충남 공주 출생
1955년 3월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
1955년 5월 서울대학교 법대 석사과정
1958년 서독 쾰른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1962년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
1973년 10월 16일 중앙정보부에 출두
1973년 10월 19일 조사받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중앙정보부(前 국가안전기획부)는 73년 10월 25일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 명단에는 73년 10월 19일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 동지도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해명은 동지가 “범행사실을 자백한 후 국내 간첩조직망에 대한 여죄를 조사받던 중 용변을 보겠다고 변소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내외적인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간첩단 조작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중앙정보부의 연락을 받고 동지가 출두하기 이전 동베를린을 거쳐 평양에 다녀온 것으로 사건 조서가 꾸며져 있었고, 투신했다는 현장을 공개하지 않고, 부검을 완강히 거부한 속에서 유가족을 협박해 장례를 급히 치루게 만든 점은 고문에 의한 타살을 은폐하기 위한 술책으로 간주된다.
no6
함 석 헌 (당시 88세)
1901년 3월 13일 평북 용천군 출생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학업 중단
1938년 3월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고
오산학교를 사임당함.
1940년 8월 동경에서 계우회사건으로 1년간 복역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용암포 자치위원장,
용산군 자치 위원장 됨
1961년 6월 5·16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글를 발표
1971년 8월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구성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 대표위원
1974년 11월 윤보선·김대중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듬, 대표위원 역임
1979년 11월 23일 명동 YWCA사건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구속
1985년 두 번째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
1989년 2월 4일 운명
함석헌 선생님은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될 정도로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독재시대에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일제시대때는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여 오산학교를 사임당하였고, 동경에서 계우회사건으로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복역하기도 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인 선생님은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에서 용암포 자치위원장, 용산군 자치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56년부터는 ‘사상계’를 집필하면서 1961년에는 5·16을 정면으로 공격하는「5·16어떻게 볼까?」를 발표하였고, 1970년에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1971년에는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는 한편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1974년에는 윤보선·김대중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었고, 1979년 11월 23일, 명동 YWCA사건으로 계엄사에 끌려가 15일간 구속되기도 하는 등 암울한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 1989년 2월 4일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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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인 철 (당시 53세)
1940년 1월 24일 충남 대덕 출생
1961년 10월 13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1962년 2월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
1981년 ‘전국자폐아부모회’ 회장 역임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대표역임
1989년 경제정의실천연합 공동대표 역임
1990년 민주화실천변호사모임 대표간사 역임
직장암 진단을 받음
1991년 윤석양 사건 변론 맡음
1992년 ‘계명복지회’ 회장 역임
1993년 1월 20일 지병으로 운명
경기도 안성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황인철 동지는 유신 시대 이래 20년 가까이 권력의 폭압과 횡포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해 온 인권변호사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권변호사’라는 개념조차 없던 불모의 시대인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서 민청학련 사건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 70, 80년대 시국사건의 변호를 맡았는데 민청학련 사건, 김지하 반공법위반사건, 3.1구국선언사건, 동아·조선투위사건, 청계피복노조사건, 한승헌 필화사건, 동일방직노조사건, YH사건,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원풍모방사건, 강원대 성조기 방화사건, 오송회 간첩사건, 대우어패럴사건, 서울미문화원사건, 건국대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사건, 문익환 목사 및 임수경·문규현 방북사건, 윤석양사건 등의 사건이 그것이었다. 또 자신을 포함한 젊고 진보적인 변호사들이 함께 조직한 ‘민주사회을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결성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